박관우 시사칼럼니스트

 

1902년 고종황제 등극 40주년을 기념하여 공덕을 기리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석고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 석고각이 1913년 일제에 의하여 원구단이 철거되면서 그 비극의 역사가 시작된다.

석고각은 건축물로서 볼 때도 그 웅장함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석고각이 1935년 박문사의 종루로 전락된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당시 약소민족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런데, 석고각이 이렇게 수모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로 넘어간 것을 시작으로 원구단이 철거되고, 그 여파로 당시 석고단 영역에 있던 석고각이 1935년 4월 박문사의 종루로 전락되면서 비롯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석고각에 중대한 위기가 닥칠 뻔하였으니 그것은 해방이후인 1945년 11월 23일 석고각이 위치하고 있었던 박문사에 화재가 발생한 것인데, 사실 필자는 박문사에 화재가 일어난 기사를 확인하고 일단 소실되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던 것인데, 지난 칼럼에서 이미 소개한 대로 석고각이 1958년까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진을 발견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석고각이 위치하고 있던 박문사 터에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1959년 1월부터 영빈관 공사를 착공하여 1967년 2월에 준공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하고 관련 자료를 수소문한 끝에 당시 영빈관 설계 및 시공업체와 관련된 자료를 입수하게 되었다.

한편 필자가 얼마 전에 삼성이 1973년 영빈관을 인수할 당시의 전경을 담은 사진과 이어서 1974년 영빈관을 홍보한 동영상을 보면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건물을 발견하였는데, 이 건물을 특히 주목하였던 이유는 일단 위치상으로 볼 때 일제시기 박문사 본당을 중심으로 우측에 있었던 석고각의 위치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구체적으로 영빈관 공사 시에 석고각이 있던 위치에 새로운 건물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석고각을 철거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고 바로 그 자리에 그 건물을 지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은 일단 철거된 쪽에 무게를 두고 싶은데, 그러한 근거는 약 5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석고각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석고각의 흔적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어떤 경위에 의하여 없어지게 되었는지 그 내력만큼은 꼭 알고 싶은데, 그동안 관계기관이나 전문가에게 관련 자료에 대하여 자문을 구하였으나,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지 못한 점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당시 영빈관 공사를 정부가 주관하였다고 하기 때문에 관련기록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은 되나, 분명한 것은 현재 관련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기록을 남겨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끝으로 이번 기회에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점은 해방 전에는 일제의 지배를 받았기에 원구단의 경우와 같이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가 그리도 철저하게 수난 받아도 속수무책으로 무방비 상태였다고 하지만, 적어도 해방이후에 정부에서 문화재 보존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가 있었다면 아무리 당시에 영빈관이 국빈을 위한 숙소로서 꼭 필요했다고 해도, 이렇게 장엄하고 웅장한 석고각이 오늘날에도 어떠한 형태로든 보존되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러한 석고각의 불행을 뼈저린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 앞으로는 문화재의 고귀한 가치에 대하여 우리 사회에 커다란 경종을 울리는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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