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독립투사(12)

▲ 조소앙 선생. (사진제공:독립기념관)
[뉴스천지=유영선 기자] “저는 여러분께 맹세합니다. 우리 민족 독립을 성공하리다. 아기마다 대학을 졸업하게 하오리다. 어른마다 투표하야 정치적 권리를 갖게 하오리다. 사람마다 우유 한 병씩 먹고, 집 한 채씩 가지고 살게 하오리다.”

1946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갑작스럽게 찾아온 해방으로 인한 수많은 이념의 갈등, 극심한 정당과 계파 간의 갈등 속에 민족의 자주적인 독립과 통일을 외친 이가 있다. 그는 바로 조소앙 선생이다.

그는 해방은 됐으나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던 그 시기에 독립을 위한 공감대로 제시한 삼균주의의 평등사상, 다시 말하면 민족 구성원 모두의 평등을 지향했던 사상을 주창한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 사상가였다.

1887년 4월 30일 경기도 파주에서 6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한 그는 어려서부터 다재다능해 조부에게 한학을 배워 사서⋅시경⋅서전을 통달했다. 1902년 성균관에 최연소로 입학, 수학 중 이하영 등의 반민족 음모를 막기 위해 신채호 등과 제휴해 성토문을 만들어 항의⋅규탄했다.

1904년에는 성균관을 수료하고,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도쿄부립제일중학교를 거쳐 1912년에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귀국해 잠시 경신학교·양정의숙·대동법률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1913년 중국 상해로 망명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조 선생은 상해에서 신규식·박은식·신채호·정인보 등과 동제사(同濟社)를 박달학원(博達學院)으로 개조해 청년들을 교육하는 등 항일단체 대동당(大同黨)을 조직했다.

1915년에는 국내외 동포들의 대동단결과 민족의 종교적 단결을 목적으로 육성교를 창안했다.

1917년에는 7월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하고, 그해 그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하는 국제사회당대회에 조선사회당 명의로 한국독립문제를 의제로 제출해 통과시켰다.

이를 시발로 한국의 독립문제가 국제기구에서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됐다.

특히 1918년 독립운동인사 39명의 동의와 서명과 함께 조 선생이 기초한 무오독립선언서는 국내외 독립운동에 큰 영향력을 떨쳤으며, 3.1운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같은 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시헌장’과 ‘임시의정원법’을 기초하는 등 초기 임시정부 수립에 산파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또 그는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힘쓰고, 임시정부에서 국무원 비서장·외무부장, 임시의정원의장 등을 역임하고, 한국독립당의 창당위원장 및 부위원장 등 핵심간부로서 활동했다.

▲ 1936년 중국 광동의 중앙육군군관학교 생도인 두 아들 시제(뒷줄 가운데), 인제(뒷줄 오른쪽)와 함께한 조소앙 선생. (사진제공:독립기념관)
하지만 독립운동 세력의 대립과 분열이 심해지자 조 선생은 각 단체의 단결과 통일을 위해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핵심으로,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 간, 국가 간에 균등한 생활을 이루자는 ‘삼균주의’를 창안했다.

이는 1930년 창당된 한국독립당의 당의·당강으로 채택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1930년대 이후 좌우익 독립운동단체의 주요 이념으로 채택됐다.

특히 삼균주의에 입각해 광복 이후의 국가건설 계획인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해 공표케 했다. 환국한 뒤에는 김구와 함께 임시정부의 정통성 고수를 주장하면서 삼균주의청년동맹과 삼균주의학생동맹을 결성해 이에 기초한 국가건설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8년 4월에는 단독정부에 반대해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 차 평양에 다녀오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하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사회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이 됐고, 1950년 5.30 총선에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해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돼 제2대 국회에 진출했으나, 6.25전쟁으로 서울에서 강제 납북돼 1958년 9월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제공: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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