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 서울광장 옆에는 덕수궁(德壽宮)이 자리 잡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다니고, 정문 격인 대한문(大漢門)을 쳐다보지만 그저 무심할 따름이다. 그러나 무심한 가운데 있는 덕수궁과 덕수궁의 대한문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외면당한 채 오늘도 묵묵히 무언가를 전하고 있다. 

이 덕수궁은 그저 고궁이며 관광 명소에 불과한가. 또 시위나 집회를 합법화 시키는 장소쯤인가. 분명한 것은 치욕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수치의 상징이며 나아가 교육의 현장이라는 사실이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었으며, 정문 역시 대안문(大安門)이었다. 원래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고종황제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만천하에 선포한 후, 현 조선호텔 자리에 원구단(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던 곳)을 세우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했으며, 원구단과 황제가 기거하는 경운궁(현 덕수궁)을 잇는 통천로(通天路)를 만들어 대한제국의 황제가 하늘과 바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이때 세운 문이 바로 대안문이다. 이 ‘대안’의 뜻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의미로 나라를 태평스럽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지어졌다. 그렇다면 어찌해 경운궁과 대안문 대신 덕수궁이라는 이름과 대한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까.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연이어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침탈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기에 일컫는 말)을 체결하므로 사실상 일본의 식민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일제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는 경운궁을 경로당의 의미를 지닌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꾸고, 대안문 역시 대한 즉, ‘큰 사내란 의미’를 가진 대한으로 바꾸어 걸었다. 흔히 괴한(怪漢) 파렴치한(破廉恥漢) 등으로 쓸 때 사용하는 글자로 ‘큰 천한 사내가 사는 집’으로 황제를 비하하고 나라를 모독하고 민족의 정체성에 혼란을 주기 위한 술책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치욕의 역사가 시작된 지 100년을 훌쩍 넘겼고, 해방된 지도 반세기를 훌쩍 넘겨 1세기를 바라보고 있지만, 이를 아는 이도 없고 알아도 관심도 없다. 다만 오늘도 대한문은 말없이 덕수궁 돌담길 한 쪽 구석에서 관광객들을 불러들이는 호객행위에 분주할 뿐이다. 

몸은 속박에서 벗어나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정신은 아직도 식민 상태에 그대로 놓여있다 한다면 억지일까. 곳곳에 남아 있는 이러한 잔재들을 아무런 생각도 문제의식도 갖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하기까지 하다. 바벨이라는 말처럼 외래와 함께 거짓 왜곡되고 짜깁기된 문화, 혼용과 혼돈의 문화는 오늘날 퓨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먹고 입고 살기에 편리함만 추구하면서, 하늘과 소통했던 우리 고유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의 정통성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어쩌면 모두가 죽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4천여년 전 세계의 문명을 일으킨 세계 4대문명(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 이전에 대륙에는 우리 민족이 일으킨 찬란했던 홍산문명(紅山文明)이 이미 2천년 앞서 존재했다. 이때 우리 민족은 하늘과 소통한다는 의미로 머리에 상투를 틀어 올리고 살았으며, 상투를 메는 의식은 ‘내 마음을 상제님 마음에 맞추는 의식’으로 한민족만이 가졌던 고유문화였다. 나아가 신령한 의미를 지닌 옥으로 만든 옥기(玉器)들, 그중 옥고(玉稿, 상투를 고정시키고 덮는 데 사용된 옥으로 만든 관)를 만들어 상투 위에 올렸으니 틀림없이 하늘과 함께한 제사장나라였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것은 소설 ‘상록수’다. 일제 치하에서 태어나 자란 청년들은 당시 일제에 의한 식민 통치가 당연한 삶으로 여기며 살아갈 때, 채영신과 박동혁 등 소설 속 등장인물같이 청년들의 생각과 의식을 깨우는 농촌계몽운동 즉, 의식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청년들의 의식이 살아나고 독립의 당위성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독립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 볼 필요성이 있다. 이 시대 또한 몸은 구속에서 벗어났다 하나, 우리의 생각과 사상은 아직도 식민사상의 잔재와 더불어 사대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이야말로 의식을 깨우고 정신을 깨우는 계몽운동이 절실한 시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고 지나친 국수주의와 민족주의를 통한 이기주의의 길을 가자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 올바른 정체성을 바로 확립할 때,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시대를 이해하고 리드해 갈 수 있는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며, 자신을 모르고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기 때문이다. 명심할 것은 아무리 유치하고 치욕스런 역사라 할지라도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더 간직하고 보존해야 한다. 다만 먼저 알고 보존해야 한다. 치욕의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이며, 후대에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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