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니콜라스 레이가 감독한 ‘이유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은 1950년대에 만들어진 흘러간 명화다. 10대들의 방황과 폭력, 풋풋한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10대의 영원한 우상 제임스 딘과 청순한 이미지의 나탈리 우드가 주연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주연들은 모두 저 세상 사람들이 됐다. 하지만 이 영화가 안겨주는 팽팽한 긴장감과 감동은 세월을 뛰어 넘어 지금도 우리의 가슴에 진하게 와 닿는다. 예술의 생명력이요 위대성이다.

이 영화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대목의 하나는 캄캄한 밤에 벌어지는 ‘치킨게임’이다. 어느 학교에 막 전학 온 짐 스타크(제임스 딘)와 짐 스타크에 싸움을 건 토박이 패거리 대장 버즈 사이의 이판사판 목숨을 건 대결이다. 해안 절벽을 향해 자동차를 몰아 질주하는 위험천만한 게임. 겁을 먹고 먼저 뛰어 내리면 진다. 먼저 뛰어 내리면 안전하게 목숨은 건지지만 그는 또래들 사이에서 영원히 겁쟁이의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한다. 이는 10대의 치기어린 자존심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드디어 운명의 대결이 벌어진다. 짐은 아버지에게 묻는다. ‘명예를 지켜야 하는 중요한 일이 있는데 그것이 정말 위험한 일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짐이 겁쟁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대답은 ‘무조건 신중한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미지근한 대답을 뒤로 하고 짐은 결연하게 집을 나와 대결의 장소로 간다. 거기엔 버즈와 그의 패거리들 그리고 주디(나탈리 우드)가 기다리고 있다. 게임 시작을 알리는 신호는 절벽을 등지고 선 발랄하고 아름다운 주디가 한다. 주디는 짐도 좋아하지만 버즈와 주디는 더 일찍부터 사귀어온 사이다. 주디의 수(手)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둘은 동시에 붕하고 출발, 절벽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린다.

누가 먼저 뛰어 내릴까. 먼저 뛰어 내린 사람은 예상과 달리 짐이었다. 차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기 직전에 그는 아슬아슬하게 뛰어 내린다. 그런데 버즈는 자동차와 함께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만다. 짐의 싸움의 적수, 사랑의 라이벌인 버즈는 그렇게 죽는다. 그 역시 뛰어내리려 몸부림쳤지만 옷이 자동차 문에 끼어 뛰어 내릴 수가 없었다.

치킨게임-. 치킨게임이란 어느 한쪽이 루저(loser)가 되기로 각오하지 않으면 싸우는 두 사람 모두가 불행한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무모한 싸움이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필부지용(匹夫之勇)의 과시이며 맹목적인 담력 테스트다. 이 영화의 상황 설정이 다소 극적이고 특수하긴 하지만 어쨌든 치킨게임이란 용어가 바로 이 영화에서 발원했다는 말이 있다. 한밤중에 자동차를 몰아 서로 마주 보고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적수들의 대결 역시 치킨게임이다. 치킨게임은 국제정치학상의 용어로도 쓰인다. 예컨대 냉전시대에 벌어진 미국과 소련 간의 핵 경쟁을 치킨게임이라 했다. 또한 남북한의 소모적인 군비 경쟁도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우리 내부의 집안싸움이 얼추 이 같은 치킨게임 같지 않은가. 세종시 문제만 봐도 그렇다. 정당 간에 그리고 정치 분파 간에 전혀 생산적인 지향점이 보이지 않는 난타전의 연속이다. 정치는 현실인데 원안이냐 수정이냐를 놓고 마치 종교의 원리주의나 근본주의에 입각한 싸움 같은, 도저히 타협을 기대할 수 없는 대립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강행과 저지, 둘 사이의 영락없는 치킨게임이다. 기어이 주장이 다른 한쪽의 무릎을 꿇리든지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식인데 이것은 정치가 아니고 무자비한 전쟁이다.

민주주의는 갖가지 갈등이 드러날 때 이것을 국가의 활력으로 바꾸어 낼 수 있어야 진정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제도다. 그러자고 제(諸) 정당이 있고 국민이 국회의원을 뽑은 것 아닌가. 그럼에도 이런 정치시스템에 의해 도리어 갈등이 증폭되고 부채질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니 국민들이 정치를 걱정하는 역설이 생기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어디 세종시 문제뿐인가. 이미 공사가 착수된 4대강 정비 사업도 그러하다. 심각하게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좌우 이념 대립도 마찬가지여서 정치에 의해 그것이 총화적으로 아우러지지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이념 대립은 항상 사회 평화에 대한 위험한 파괴 요인으로 상존할 뿐이다.

지금은 정치인들이 자신과 시대적, 역사적 소임에 대해 좀 더 비상하고 진솔하게 성찰해야 할 때다. 치킨게임에서 벗어나 국가 활력을 위한 에너지 창출에 힘을 모으고 눈을 크게 떠 격동하는 한반도와 국제정세에 철저히 대비하고 준비해야 할 때라는 것이 자명해진다.

‘한국의 통일이 생각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는 쾰러 독일 대통령의 말에 귀가 번쩍 트이지 않는가. 초조한 김정일, 평화냐 대립이냐의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북한 정권의 모습에서 뭔가 큰 격변의 조짐을 읽을 수 있지 않는가. 격동의 큰 바람이 일고 있다. 무슨 일이라도 우리가 대비하고 준비를 갖추고 있으면 걱정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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