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이주희

검은 목공단 같은 하늘의
아버지 단장(短杖) 손잡이처럼
허리 굽은 바나나

이 자식 저 자식이 드린 용돈 쌈지에 모셔두고
약줏값 담뱃값 아끼고 아껴
끼니 걱정되는 셋째 딸네 손주들
입맷거리로 한아름 사 오시던 바나나

봄날 안마당의 산수유만큼 화사했던 아버지의
고랑지고 이랑진 얼굴에 돋아난 검버섯같이
거뭇거뭇해진 바나나

[시평]

몸통이 노오란 조금은 굽은,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면 거뭇거뭇 그 껍질의 색이 변해가는, 그러나 그 맛이 한결같은 ‘바나나’를 바라보며, 아버지 생각을 한다. 아버지께서 노년에 늘 짚고 다니시던 단장(短杖) 손잡이처럼, 그 바나나 허리가 굽었기 때문이리라.

아니다. 이 자식 저 자식이 드린 용돈, 약줏값 담뱃값 아끼고 아껴 쌈지에 모셔두었다가, 끼니 걱정되는 셋째 딸네 손주들 입맷거리로 바나나 한아름 사 오셨기 때문이리라.

아니다. 바나나의 색 변한 껍질을 보면, 봄날 안마당의 산수유만큼 화사했던 아버지께서 이제 연세가 되시어, 고랑지고 이랑진 얼굴에 거뭇거뭇 검버섯이 돋아난 그 아버지 모습, 보는 듯하기 때문이리라.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이제는 머나먼 하늘나라로 떠나시고 안 계신 아버지, 어느 날 문득 그 아버지 목 메이게 보고 싶어서이다. 아, 아 아버지 그렇게 다만 보고 싶어서일 뿐이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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