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 칼럼니스트 

 

백여년 전 우리나라에 전화가 도입됐지만 처음에는 호응을 얻지 못했다. 사람을 보지 않고 기계로 대화하는 것이 어색했고, 어른을 전화기 앞으로 불러내는 것이 예의에도 맞지 않다고 여겼다. 지체 있는 사람들은 할 얘기가 있으면 하인을 시킬 일이지 굳이 전화기를 들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먼 지방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그래서 서울 시내 전화보다 시외 전화가 먼저 생겼다. 그것이 1902년이다. 

그 이후 상공인들을 중심으로 전화기가 많이 보급됐다. 그러나 전화기는 주로 일본인들 차지였다. 전화 가입자 열에 여덟은 일본인이었다. 1924년 서울에서 전화를 가진 5969명 중 일본인이 4875명, 조선인 951명, 외국인 143명이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에게 전화기는 그림의 떡이었다. 전화기를 설치하는 비용과 인력은 조선인이 감당하고 정작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일본인이었다. 

1924년 4월 21일 동아일보는 이런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조선인의 서울인가 일본인의 서울인가. 문명의 이기인 전화로 보아도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우리는 조선의 오늘날 문명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다. 조선 사람아, 우리는 이 문명의 주인이 되도록 전력을 다하자. 만일 그렇지 못하거든 차라리 이것을 깨뜨려 버리자.’

1920년 7월 18일자 조선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전화를 한번 하자면 수화기를 들고 전화통 앞에 서서 빨리 나와야 5분 내지 10분이고 그렇지 않으면 30분 내지 1시간 이상 서 있어도 나오는 일이 없으니 (중략) 나중에는 발광을 할 지경으로 발을 구르며 욕설이 입에서 절로 나오게 할 뿐 아니라 전화통을 깨어 두드려버리고 싶은 생각이 나게까지 한다.’ 

전화를 교환수가 수동으로 연결해야 하는데 그게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당시 교환수는 ‘별천지에서 노는 신선의 직업’으로 불렸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게 아니었다. 교환기는 낡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고, 교환수들은 창문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고강도의 업무를 견뎌야 했다. ‘앞에는 손님의 야비한 욕설, 뒤에는 교환감독의 꾸지람’이 교환수들을 압박했다.

교환수들은 조선의 어린 여자들이었다. 초등학교 이상 배우기는 했어도 가난 때문에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일제는 십대의 어린 소녀들을 착취했다. 십 분 만에 점심을 먹어야 했고, 휴식 시간도 없이 밤낮을 교환대 앞을 지켜야 했다. 무엇보다 ‘고달픈 귀를 더욱 시달리게 하는 주정꾼의 전화’가 ‘어린 몸에 고된 직업 전화교환수’들을 괴롭혔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교환수도 없고 공중 전화기마저 보기 힘든 세상이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껏 전화를 하고 메지지를 주고받는다. 그럼에도 1920년대 신문 기사처럼 ‘전화통을 깨어 두드려버리고 싶은 생각이 나게’ 할 때가 있다. 쉼 없이 날아드는 쓰레기 문자와 휴식을 방해하고 산통을 깨는 전화벨 소리 때문이다. 전화기를 붙들고 ‘진상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상담원들의 고통도 여전하다. 

정호승 시인은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니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고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다릴 전화마저 없다는 것은 문제다. 지금도 누군가는 전화가 올 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것도 내 전화가 오기를. 곧 어버이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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