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태양 아래’ 스틸. (제공: THE픽쳐스)

러시아 비탈리 만스키 감독
촬영 전후 카메라 켜서 실상 찍어

부유한 북한 가정 외동딸 진미
어딘가 낯선 표정으로 눈만 껌벅
진실은 행복한 일상 연기한 것

부엌 찬장은 비었고 집은 삭막
소녀는 없고 결국 남는 건 북한뿐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1953년 휴전 이후 반세기 이상 분단됐던 한반도. 우리는 같은 언어, 같은 민족이지만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언론, 종교, 인권 등 모든 자유가 억압된 북한 사람들은 행복할까.

철저하게 베일에 감춰져 있던 북한의 민낯이 영화 ‘태양 아래(감독 비탈리 만스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됐다. 영화 ‘태양 아래’는 러시아 감독의 시선에서 바라본 북한의 현실을 드러내는 다큐멘터리다.

8세 소녀 진미는 외동딸로 부모님과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버지는 봉제공장의 기사로, 어머니는 두유공장 직원이며, 진미는 평양 최고의 학교에 다니고 있다. 진미는 북한 최고로 인정받는 조선소년단해 입단해 북한 최대 명절 중 하나인 태양절(김일성의 생일) 행사를 준비한다.

발레를 배우고, 하교 후엔 부모님과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저녁을 먹고, 밤이 되면 따뜻한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한다. 하지만 진미의 얼굴엔 표정이 없다. 사슴 같은 눈을 껌벅거리기만 할 뿐, 웃음과 슬픔, 기쁨이 표정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남한의 같은 또래에서 느낄 수 있는 천진난만함이나 떼쓰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공연하며 웃는 모습은 감정 없는 인형과 같았다.

모든 것은 북한 당국이 철저하게 만들어 낸 북한 상류층의 행복한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진미를 포함한 모든 것들은 조작된 것이었다. 진미네 좋은 아파트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삭막했으며, 심지어 부엌 찬장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또 인터뷰 초반에 진미가 제작진에게 아버지는 신문기자, 어머니는 식당직원이라고 말했던 것과 달리 부모님의 직업은 바뀌었다. 학교에선 8살짜리 초등학생에게 “경애하는 대원수님은 동무들에게 왜놈과 지주놈들은 다 같이 나쁜 놈들이란 것을 깨우쳐 주시었습니다”라는 말을 수없이 세뇌한다. 아이들은 앵무새처럼 말을 외치고, 또 외친다. 이뿐만 아니라 극 중간마다 등장하는 북한 주민들의 표정이 가관이다. 가라는 대로, 하라는 대로가 일상이 된 이들은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 영화 ‘태양 아래’ 스틸. (제공: THE픽쳐스)

러시아 출신인 비탈리 만스키 감독은 1년간 북한 평양에 머물며 8세 소녀 진미와 그의 가족, 친구, 이웃 등 평양 주민들의 실상을 앵글에 담았다. 같은 민족이지만 알 수 없었던 북한의 실상을 다른 나라 감독의 카메라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볼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비탈리 만스키 감독은 거짓 선전 속에 가려진 실상을 그대로 남아내고 싶었지만 북한 당국의 철저한 간섭 속에서 짜인 시나리오대로만 찍어야 했다. 감독은 북한의 지시에 따르면서도 촬영 전후 카메라를 끄지 않는 방법으로 조작된 모습을 찍어 그대로 영화에서 삽입했다. 호텔 등에서 찍은 실제 북한의 모습을 몰래 빼돌리는 방법으로 담아내기도 했다.

영화를 통해 본 북한은 정말 진짜였다. 북한 당국이 주민들을 세뇌하게 시키고, 인권 유린을 정당화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진미 옆에선 정부 관계자가 ‘웃어라’ ‘대사는 이렇게 하라’ ‘좋게 하라’ 등의 연출을 지시했다. 영화 속 진미의 일상은 마치 ‘트루먼쇼’의 세트장이었다. 북한의 시나리오대로 라면 거대한 북한 PPL이 완성되는 셈이다.

영화 속 진미의 자발적인 참여와 결정권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진미는 태양절 축하 공연을 준비하며 무용을 배울 때 힘들어 조금만 쉬고 연습하겠다는 의사 표현도 할 수 없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쩌면 진미는 소년단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싫어했을지도 모른다. 진미는 없고 오로지 북한만 있었다.

▲ 영화 ‘태양 아래’ 스틸. (제공: THE픽쳐스)

영화 후반부 제작진은 진미에게 “소년단을 통해 이루게 되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진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직생활’이라며 8살 아이가 사용하지 못할 법한 단어로 설명했다. 끝내 진미는 눈물을 보였다. 진미를 달래기 위해 제작진은 질문을 바꿔 “가장 행복했던 일이나 즐거웠던 일을 떠올려 보라”고 하자 진미는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이후 진미는 시를 떠올려보라고 하자 김일성 3대를 찬양하는 시를 기계처럼 읊었다. 이 모든 현실이 작은 체구의 진미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연극이었다.

비탈리 만스키 감독은 “한국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의 수많은 영화관들이 정말 중요하고 아픔이 있는 이 영화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외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예를 들면 상영시간을 아침 일찍 배치하거나 밤늦게 배치하는 등이다. 어떻게 보면 상업성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는 듯한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영화 개봉 후 걱정되는 것은 진미와 가족들의 안전이다. 영화는 러시아와 북한 정부의 상영금지 압박으로 러시아 상영이 취소된 바 있다. 이와 관련해서 비탈리 만스키 감독은 “진미와 연락할 수 있는 전화나 인터넷 소통이 가능한 정보가 전혀 없다”며 “영화에 대한 관심이 북한에 있는 진미와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길 바란다”는 말뿐 특별한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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