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 애절하고 고색창연한 우리의 옛 노래, 청춘고백의 1절이다. 이 노래 2절은 더욱 노골적으로, 남녀 정인(情人) 사이에 벌어지는 이율배반적인 애증(愛憎)의 교차를 읊어낸다. ‘좋다할 땐 싫다하고 싫다할 땐 달겨드는 모를 건 이내 마음…’ 이렇다. 이래서 청춘고백의 노랫말과 멜로디는 옛 가요 특유의 가슴 찡한 감성적 호소력으로 애청자들을 처연한 분위기에 푹 젖게 한다. 노래는 짧다. 그렇지만 그 여운(餘韻)만은 긴 비련의 서사시만큼이나 길게 마음속에 남는다는 느낌을 갖는다.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서만 살아 갈 수 있다. 호랑이처럼 외톨이로 독자 생존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인구가 과밀한 환경에 신물이 난 사람들이 오지나 벽지의 호젓한 환경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물론 그렇게 못 살 것이 없고 그런 삶이 사람에 따라 만족을 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는 일은 거의 없다. 과거의 과밀한 환경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한 번이라도 나지 않을 수도 없다. 산사(山寺)의 스님도 속세와 인연을 끊고는 못 살아간다. 속세의 대중(大衆)과 인연을 끊는다면 그들은 스님일 필요가 없으며 속세에서 제공하는 음식과 의복이 없다면 그들은 삶을 이어가지 못한다. 누구든 먹고 입고 안식할 공간이 있어야 공부도 하고 도도 닦고 포부를 키우고 그것을 이룰 수도 있다. 

사리가 이러함에도 우리는 과밀한 환경에 자주 짜증을 내고 사람과의 사이가 가까워질 때 가끔은 불편해하며 서로 멀어지고픈 역설적 심경(心境)을 경험한다. 사이가 가깝고 친밀하면 친밀할수록 마음을 멀어지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고 토라지게 하는 그 ‘역설’의 부담이 더욱 더 커진다. 심하면 피차에 심리적 외상, 트라우마(trauma)를 안겨주게도 된다. 진짜 알다가도 모를 것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 마음인 것이 틀림없다. 사람이 각자 그 사람 마음의 주인인 것 같아도 기실 사람은 각자 마음의 고삐를 꼼짝 못하게 쥐고 있지 못하며 온전하게 잘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사람 마음속에는 항상 애증의 엇갈림과 갈등이 있고 싸움이 있으며 크고 작은 출렁임이 있어 평화와 잔잔한 호수와 같은 고요가 길게 자리 잡기 어렵다. ‘호저(豪猪) 딜레마(porcupine dilemma)’라는 것이 있다. 바로 청춘고백의 노랫말과 같이 가까워지면 서로 불편해하며 떨어지고 싶어 하는 호저들의 이율배반적인 생태적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완벽하게 그려낼 방법은 없으나 그 작동(作動)의 극히 일부나마라도 재미나게 설명하기 위해 ‘호저 딜레마’라는 개념을 고안해낸 것 같다. 꽤 집요한 ‘관찰’ 노력과 상상을 통해서일 것이다.   

더 말할 것 없이 호저는 빳빳한 가시 털이 온 몸을 뒤덮고 있는 자그마한 몸집을 가진 짐승이다. 그 가시 털은 피부에 찔리면 파고들어 큰 고통을 주기 때문에 사자와 같은 초원 최상위의 포식자(predator)들도 함부로 호저에 접근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것들도 사람처럼 가까이 붙어 있을 때 싸우곤 하며 멀리 떨어지고 싶어 할 수 있다고 한다. 몸을 찌르는 그 가시 털이 화근이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하는 것은 그 까닭에서 사람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것들은 마음에서 일부러 가까이 있는 것이 싫어 서로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몸이 붙어 접촉이 이루어지게 될 때 날카로운 가시 털이 찔러 반사적으로 몸을 멀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그것들은 사람의 경우와 같이 변덕스러운 마음 탓으로 서로 멀어지고 불편해하고 토라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몸뚱이의 특이성 탓으로 그리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추측도 가능할 수 있다. 호저들은 가시 털 때문에 아예 신체적 접촉을 못하고 사는 것은 아니며 다만 간혹 부주의나 실수에 의해 서로 찌르고 찔리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가정이다. 만약 원천적으로 신체적 접촉이 불가능하다면 그것들은 번식이 중단돼 이미 오래전에 지구상에서 멸절(滅絶)됐어야 옳다. 이렇기에 그것들은 본능적인 배려(配慮)에 의해 서로 찌르고 찔리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호저들은 기특하게도 상호 간의 불편한 문제를 서로에 대한 배려로 잘 해결하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개인적 사회적 문제들은, 가장 기본적인 사적(私的) 단위의 일로부터 사회적인 온갖 갈등과 불화에 이르기까지, 상대와 남에 대한 ‘배려’의 부족에서 연유되고 있다고 봐진다. 호저와 같은 짐승들의 배려심은 본능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지만 사람의 그것은 얼마든지 무한한 수준으로 배양(培養)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배려의 덕목을 제대로 가르치고 배양하는 곳이 전무한 실정이어서 개인과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토대와 자세는 갈수록 배려라는 ‘가장 중요한 기본’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심지어 가정이나 학교에서의 관심도 감수성 예민한 아이나 청소년들에게 인성과 인격의 배양에 훈육의 노력을 치중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회를 무슨 ‘사냥터’나 ‘전쟁터’쯤으로 인식하게 해 앞뒤 가리지 않는 강하고 뛰어난 ‘사냥꾼’이나 사회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전사’를 양성하기에 정신이 없다. 심은 대로 거둔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는 말도 있다. 이런 식이라면 지금 당장이나 그 아이가 성장해 어른이 되는 때의 나라의 미래를 말하기가 무섭다. 지금도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가까이 와서 살아줄 이웃이 생기기를 고대한다. 지자체의 농촌 귀향 프로그램이라는 것도 그 취지에서 그와 아주 엉뚱한 것일 수 없다. 이에 반해 인구 과밀 지역에서는 ‘호저의 딜레마’가 심화돼간다. 예컨대 선진국이라는 자부심 속에 사회 저변 의식의 후진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골목이나 주택밀집지역의 주차 문제와 층간 소음으로 인한 폭력, 기승을 부리는 도로 위의 보복운전도 그것이다. 그나마 이것은 문제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배려’의 부족으로 삶의 터전이 살벌해지고 사회 저변의 유대가 심각하게 붕괴돼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는 모자라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문제 속에 답이 있다. 바로 ‘기본’의 전면적인 복원에 착수해야만 한다는 것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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