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하나 없다

문현미(1957~  )

 

겨울과 봄 사이
뼈 없는 바람이 언 뿌리를 휘감을 때
새악시 동백꽃 괜시리 수줍다

하늘과 땅이 모두 움트는 때
동박새 한 마리 꽁지를 치켜올린다
파르르, 첫 봄맛에 취해
그만 천기를 누설할까 보다.

[시평]

봄이 왔다. 온 천지 모두 꽁꽁 얼어버려, 어느 무엇도 다시는 이 냉혹한 추위를 뚫고 돋아나지 않을 듯한 엄동의 겨울. 그러나 스르르 녹아 만물이 절로 피어나듯이 봄은 그렇게 우리의 곁으로 왔다. 이러한 자연의 현상을 무위이화(無爲而化)라고 했던가. 함이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자연의 위대한 힘. 그리하여 얼었던 얼음도 녹이고, 겨우내 꽝꽝 묶여 있던 냇물도 다시 활기를 띠고 흐르게 하고, 죽은 듯한 나무에서도 절로 새싹이 돋아나게 하고.

이제 봄이 왔으니, 모두 모두 다시 되살아날 것이라는 이 사실. 실은 모든 이 우주의 조화를 꾸며내는 비밀인 천기(天機)가 아닌가. 하늘과 땅이 모두 움트는 때, 동박새 한 마리 꽁지를 치켜 올린다. 마치 천기를 누설하려는 듯이. 그러나 이 천기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누설이 된다. 저절로 냇물이 녹아 흐르고, 저절로 온 천지 봄볕이 퍼지고, 또 싹이 돋아나니 말이다. 이 천기 그만 온 천하에 누설이 되어도, 실은 나는 죄 하나 없다. 절로 드러나는 자연의 그 죄일 뿐이로구나.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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