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뇌신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신의 물건’으로 생각…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져
근대 학문 들어오면서 인공물로 점차 인식 바뀌어

[천지일보=김예슬 기자] 선사시대 생활필수품이었던 돌도끼.

그러나 돌도끼가 선사시대 생활도구였다는 것은 19세기 근대 학문 체계를 갖춘 고고학이 도입된 이후에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에 이러한 사실을 모르던 시절엔 돌도끼가 하늘에서 떨어진 ‘신의 물건’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는 조선시대 벼락의 신을 그린 그림에서 잘 나타난다. 조선시대 화가 김덕성(1729~1797년)이 그린 ‘뇌공도(雷公圖)’에선 손에 검을 움켜쥔 뇌신(雷神)이 북과 망치를 짊어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돌도끼를 뇌신의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또 돌도끼를 오행설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흥미로운 건 조선시대에 벼락이 떨어진 곳에서 발견한 돌도끼를 벼락도끼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벼락도끼는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는 신의 도끼로 여겨졌다. 이에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신묘한 약효가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며 임금에게 진상품으로 올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 기록돼 있다. 대표적인 예로 조선왕조실록에는 벼락도끼와 관련된 기록이 세종 23년(1441년)을 시작으로 광해군 14년(1622년)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간 7번이 나온다.

▲ 조선시대 벼락도끼로 생각한 간석기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이처럼 우연히 발견된 과거의 유물과 유적은 당대의 자연관이나 종교관에 따라 자연적인 산물로 해석됐다.

벼락도끼는 우리나라에 점차 성리학적 사회질서가 자리 잡으면서 신의 물건이 아닌 자연적인 기(氣)가 뭉쳐서 만들어진 물건으로 설명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서구의 고고학이 들어온 20세기 초부터는 벼락도끼를 사람이 만든 인공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찍개, 격지 같은 구석기시대 뗀석기와 돌도끼, 돌끌, 홈자귀 등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간석기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돌도끼에 대한 인식이 천지조화의 산물에서 자연물, 인공물로 변해온 것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전시품을 통해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오는 7월 3일까지 ‘벼락도끼와 돌도끼’라는 주제로 테마전을 열고 선사시대의 다양한 돌도끼, 조선시대 뇌신을 그린 그림, 문헌 등 149점을 전시한다. 이번 테마전에선 그동안 전시에 활용하지 않았던 조선총독부박물관 수집품과 구입품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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