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봉총 금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 때 첫 발굴, 토사 채취 목적… 보고서 없어
출토된 금관, 기생이 쓰고 사진 찍어 논란되기도 
국립중앙박물관, 무덤 크기·구조 확인 후 보고서 완간 계획

[천지일보=김예슬 기자] 봉황 장식 금관으로 유명한 신라 무덤 ‘서봉총(노서동 129호분)’에 대한 재발굴 조사가 시작됐다.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 이후 90년 만이다.

신라 마립간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서봉총은 북분과 남분을 표주박 모양으로 연이어 축조한 쌍분이다. 서봉총의 북분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고이즈미 아키오에 의해 조사가 이뤄졌다. 그러나 경동철도회사의 경주 정차장 기관고 증설에 필요한 토사를 채취할 목적으로 조사가 이뤄져 순수한 학술적 성격의 조사는 아니었다.

북분의 발굴조사엔 스웨덴 황태자였던 구스타프 아돌프가 참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남분은 3년 뒤인 1929년 영국인 퍼시빌 데이비드의 기금으로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 금관 출토 모습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당시 서봉총 발굴조사를 하면서 출토된 유물로는 봉황 장식 금관 등이 있다. 하지만 발굴조사 보고서가 없어 정확한 조사내용을 알 수 없었다. 보고서는 당시 책임자인 고이즈미 아키오가 간행했어야 하지만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는 1946년까지도 이를 만들지 못했다. 이후 서봉총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됐다. 그러다가 지난 2014년 보고서 ‘경주 서봉총Ⅰ(유물편)’이 간행됐다. 보고서는 출토 유물과 유리 건판 사진 등을 중심으로 제작됐다. 보고서엔 금관을 비롯한 573건의 유물 도면과 사진이 수록됐다. 특히 모든 금제품에 대해 순도 분석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부록으로 담는 등 금관을 비롯한 금제품을 상세히 보고했다.

서봉총 금관은 봉황 장식이 붙어 있어 다른 신라 금관과 명확하게 구별된다. 봉황은 고대에도 최고 권력자를 상징했다. 금관은 5개의 세움 장식과 봉황 장식을 고정한 2매의 긴 금판 양쪽 끝을 관테에 고정했다. 관테에도 6개의 곱은옥을 장식했다. 이는 1926년 발굴 사진과 1934년 촬영 사진에서 확인됐다.

▲ 서봉총을 발굴 중인 구스타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금관과 관련해선 교정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사한 결과 현재의 금관은 1926년 출토 당시의 모습과 다른 점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서봉총의 금관과 금관테에서 떨어진 곱은옥들은 1939년 서로 다른 번호로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등록됐다. 이에 박물관은 곱은옥이 관테에서 떨어진 것이 1934년과 1939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확한 훼손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이 시기엔 금관과 관련된 고이즈미의 만행이 있었다. 고이즈미가 평양부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한 이듬해인 1935년 서봉총 금관을 평양 기생의 머리에 씌우고 찍은 사진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바 있다.

한편 이번 재발굴조사에선 무덤의 크기와 구조 등을 확인하는 작업이 이뤄진다. 이는 오는 11월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이후 박물관 측은 ‘경주 서봉총Ⅱ(유구편)’을 간행해 보고서를 완간할 예정이다. 박물관 관계자는 “재발굴조사는 지하물리탐사를 실시해 아직 남아 있는 지하구조를 확인한 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남긴 사진 및 문서와 비교하는 등 신중하게 진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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