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심한 가난으로 그림 그릴 종이조차 없어지자 이 중섭은 부산 루네쌍스 다방에서 은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다방을 재연해놓은 전시장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아무리 미술 문외한이라도 학창시절 미술 시간에 한 번쯤 본적이 있는 작품 ‘흰소’는 이중섭(1916~1956년)의 대표작이다. 그는 ‘황소’ ‘소와 어린이’ ‘길 떠나는 가족’ 등 수많은 걸작을 남긴 한국 대표 화가이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다.

따뜻한 햇볕이 눈부시게 빛나던 지난달 29일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의 일생을 엿보기 위해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을 찾았다.

전시는 이중섭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불혹에 생을 마감한 그의 인생을 죽음부터 역순으로 소개한다.

입구를 들어가면 먼저 흑백의 사진 한 장이 관람객을 맞는다. 사진은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 공원묘지에 있는 이중섭의 묘지다. 고유번호 103434번인 그의 묘지에는 비석이나 추모비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국민화가’라는 수식어와 대조되는 쓸쓸한 모습이다. 단출한 그의 묘지는 힘들고 고단했던 이중섭의 생전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중섭에게 쏟아진 명성과 찬사는 사후에 조명된 것으로, 그는 잘 알려진 것처럼 살아있는 동안 늘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다 쓸쓸히 홀로 죽어갔다. 생활고로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에 두고 한국에서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이중섭은 작품이 팔리지 않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결국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영양실조와 간장염으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이후 무연고자로 방치됐다가 망우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 한국에 이중섭이 일본에 있는 부인과 아들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다정하고 가정적인 이중섭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투병 생활을 하던 이중섭은 대구에서 서울에 있는 수도육군 병원으로 이사해 치료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 갔다. 바로 그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있던 곳이다. 당시 그는 지인들의 권유로 ‘문학예술’ ‘자유문학’ ‘현대문학’ 등 잡지 표지 삽화를 많이 작업했다. 그가 그린 삽화에는 특유의 따스함과 천진난만함이 담겨 있고, 이와 대조되는 쓸쓸함도 묻어 있다.

다음 테마에는 대구 성가병원을 재연해 놓았다. 하얀 커튼과, 하얀 벽, 하얀 침대보가 인상적이다. 서울 개인전의 작품값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중섭은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수단인 대구 전시가 별 소득이 없자 낙담하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학하기 시작했다. 지인의 도움으로 치료를 시작하고 이때 그려진 두 마리의 소는 기존의 소와 다른 점이 눈에 띈다. ‘피 묻은 소’ ‘싸우는 소’ 두 작품은 혈흔을 보이는 등 치열하고 광기가 가득하다. 그의 절망이 반영된 것이다.

통영 항남3길 35번지. 통영 시절은 일본에서 가족을 만나고 온 다음 행보여서 희망이 충만한 시절이었다. 가족을 재회해 얻게 된 기쁨과 열심히 작업에 매진해 다시 일본에 가겠다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림을 통해서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황소’ ‘도원’이 그 예다.

‘황소’는 강렬한 황색과 붉은색의 황소가 활력이 넘치는 붓 터치와 과감한 묘사된 것이 특징이다. 특히 황소의 기운을 순간적으로 잘 포착한 역동적인 작품이며, 그의 강인한 의지가 돋보이는 걸작이다.

대구의 경복 여관 2층 9호실에서 생활할 당시 이중섭은 서울에서의 개인전은 성공했으나 작품값을 제대로 수금하지 못해 대구에서의 개인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중섭은 가지고 있던 작품을 불태우고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등 자포자기의 행동을 해 주변 사람들의 근심을 샀다. 지인들은 그가 미쳤다고 말했고 이중섭은 거울을 보고 그린 ‘자화상’을 통해 자신이 정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 대구의 경복 여관 2층 9호실에서 지낸 이중섭의 방을 재연한 모습이다. 당시 이중섭은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 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거울을 보고 자화상을 그렸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그간 성과를 모아 서울로 온 이중섭은 마포구 신수동에서 개인전을 준비한다. 이때 그는 사랑하는 아내 마사코와 주고받았던 편지들로 불안함과 초조함을 위로받았다. 그의 편지에는 가족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 배어있어 가족을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우리나라 20세기 화가 중 유일하게 은지화를 그린 이중섭. 그의 은지화는 부산 루네쌍스 다방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다방은 예술인들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전시가 이뤄지는 문화적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이중섭은 동료를 만나거나, 작품을 그리는 등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중섭은 당시 종이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연히 은지화에 그리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전쟁이 난 후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 배고픈 피난지였던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피난을 간다. 낙원 같은 곳일 것이라 예상했던 제주에서의 생활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해초와 게로 연명해왔고 이중섭이 너무 많은 게를 잡아먹어서 미안한 마음에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의 가족들이 생활했던 제주도의 작은 방이 비슷하게 재연됐다. 성인 두 사람이 겨우 누울만한 방에 이중섭과 부인 마사코, 두 아들이 생활했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가족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힘이 된 이중섭은 희망이 담겨 있는 낭만적인 작품을 주로 남겼다.

전시는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오는 5월 29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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