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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백지원 기자] “그때는 모두가 그렇게 살았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를 한 이들의 변명이었습니다.

“그건 종교가 아니었다”
“교회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신사 참배를 동의한 목회자들이 밝힌 이유였습니다.

신사참배? 일본의 종교시설 ‘신사’에 절하는 의식. 일제는 자신들의 고유 신이나 천황 등을 신으로 모신 신사들을 전국에 세웠습니다.

최근 영화 ‘일사각오’가 개봉했습니다. 적은 개봉관 수에도 개봉 열흘 만에 관객수 4만명(28일 기준)을 넘어서며 호응을 얻고 있는데요.

‘일사각오’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 후반 일제는 개별 교회는 물론 교단 총회에까지 신사참배 결의를 요구하게 됩니다.

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에 찬성하는 긴급 동의안’을 가결했습니다.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열심히 행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아래 후방의 황국신민으로서 열과 성을 다하기로 결의한다.”

그리고 결의에 이어 부회장과 각 노회장들이 총회를 대표해 즉시 평양신사에 직접 참배를 했습니다.

다른 교단들도 이어 신사참배를 했죠.

하지만 그 시절 ‘다 그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그 칼날을 향해 내가 나아가리다.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나에게는 오직 일사각오(一死覺悟)일 뿐이니라.”

주기철 목사는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저항하다 47세 젊은 나이에 옥사했습니다.

당시 평양노회가 목사직을 파면하고 교회는 폐쇄됐지만 주 목사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주 목사 외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기독교인 324명이 구속되고 50여명이 순교했습니다.

그들이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
-성경 십계명 중 제1, 2계명-

정치권력에 굴복해 다른 신을 섬기는 신사참배는 곧 배교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화로 재조명되는 주기철 목사의 신앙을 통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여러 교단들이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의 목소리를 냈지만 여전히 정권과 유착한 기독교계를 향한 지적과 비판이 쏟아지는 현실 속에서 그의 삶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물음을 던집니다.

‘진짜’ 회개의 길을 가고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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