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천지TV=서효심 기자]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1888~1970년)는 영국의 의학자이자 선교사로 한국식 이름은 석호필(石虎弼)이다.

1916년에 내한해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세균학 교수로 재직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교직을 포기하고 이 운동에 적극 협력하면서 일제의 포악상을 외국에 알리는 데 전력했다.

▲ 1961년 스코필드 박사 생일잔치날. 우측 두번째 줄에는 학창시절 정운찬 전 총리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인터뷰: 이삼열 / 전 유네스코 아태무형유산센터 사무총장]
“그때 와서 우리가 일제 시대에 너무 고통을 받고 학대를 당하고 어려운 사람 많고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동정심이 생겨서 참을 수가 없어서 무엇보다도 한국 사람들의 민족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빼앗겼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항의를 많이 하셨어요“

“일본은 합병 후 물질적으로 한국에 많은 혜택을 주었다고 하지만 어디 그것이 한국 사람을 위한 것이었을까? 정부의 진정한 의무는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중략) 일본 정부는 지금 한국 사람들이 왜 동요하고 왜 어리석을 정도로 용감하게 궐기했는가에 대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결코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자유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1919년 4월 13일 서울프레스에 실린 스코필드의 글)

[인터뷰: 이삼열 / 전 유네스코 아태무형유산센터 사무총장]
“지금도 남아있는 글 쓰신 것을 보면은 ‘한국 사람들은 당신을 강도로 보고 있습니다’ ‘빼앗겼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한국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십시오’ 이런 글을 감히 썼다고요 그때. 그러니까 얼마나 한국 사람을 사랑했어요. 그냥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잘못된 것을 비판하고 정의로운 것을 세우면서 사랑을 베푸는...”

▲ 옥중에 있던 독립지사를 찾아간 스코필드 박사. 서대문형무소 여자 8호방에서 유관순과 어윤희 등 여성독립운동가를 만나 고문당한 흔적을 치료해주고 위로해 줬다. 이러한 행동이 거슬렸던 일본 정부는 1920년 스코필드 박사에게 체류연장을 빌미로 강제 출국 시킨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어윤희, 유관순 등의 독립지사들을 면회하며 대한민국의 독립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줬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이했다.
 
[인터뷰: 이삼열 / 전 유네스코 아태무형유산센터 사무총장]]
“4년이 됐는데, 16년에 와서, 그다음에 체류연장이 돼야 되는데 일본 정부가 체류연장을 안 해주는 거예요. 강제로 내 보내는 것이지, 그래서 할 수 없이 1920년에 쫓겨서 캐나다로 돌아가시는 거죠.  ”

1958년 우리나라 정부수립 10주년 기념경축식에 초빙돼 내한했다가 같은 해 이승만의 추천으로 서울대 수의과대학 학장으로 부임해 병리학을 가르쳤다.

이후에는 고아원 두 곳을 설립하고 가난한 학생들의 유학을 지원하고 중고등학생들의 영어성경공부반도 지도했다. 그리고 때마다 3.1운동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줬다.

▲ 1962년 스코필드 박사가 학생들에게 3.1운동의 정신을 일러주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인터뷰: 이삼열 / 전 유네스코 아태무형유산센터 사무총장]
“성경공부하면서도 내내 그런 가르침이셨고 또 우리는 사실 3.1운동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가 얼마나 못 살고 얼마나 고통당했는지 잘 모르잖아요.
그런 얘기를  직접 와서 보고 도와주신 스코필드 호랑이 할아버지로부터 얘기를 들으니까
우리는 너무나 좋았고 많은 것을 배웠고 감동했고 그런 것이 우리 삶에 영향을 줘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사회적인 봉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할아버지의 가르침과 덕이 아니었나 생각을 하죠. ”

3.1운동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석호필 박사는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릴 정도였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했던 석호필 박사.

학생들에게 석호필 박사는 그저 따듯하고 자상한 할아버지였다.

스코필드 박사가 남긴 사진을 통해 그 찬란하고 가슴 벅찬 만세운동 현장과 일본에 짓밟힌 참혹한 역사들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철석같은 굳은 의지를 나타내는 돌석, 호랑이같이 무서운 사람임을 나타내는 호랑이 호,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의미하는 도울 필, 스코필드 박사가 좋아하고 즐겨 사용했다던 한국이름 석.호.필.

1959년 이후부터 우리나라에 영주해 대한민국 땅에서 여생을 마친 스코필드 박사.

박사는 196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고 1970년 4월 12일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땅에 묻어달라던 그의 유언대로 1970년 4월 16일 외국인 최초로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우리는 역사를 카메라에 담아 기록으로 남겨준 스코필드 박사의 헌신과 노력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정신과 굳은 의지는 우리가 배워야 하는 선조들의 가르침과 같기 때문이다.

온전한 몸으로도 하기 힘든 일들을 몸소 실천했던 석호필 박사.

그가 아니었다면 역사적인 그 순간을, 고통과 아픔의 그때를 지금 우리는 함께 나눌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호랑이 할아버지가 보여준 정의를 향한 불굴의 정신과 인간애를 생각하며 힘을 얻곤 했다’
- 이삼열(전 뉴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

‘그를 만난 것은 내 생의 축복이자 행운이었다. 인생의 고비마다 나는 스코필드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나를 채찍질한다’ - 정운찬(전 국무총리) -

▲ 지난 2월 22일 진행된 호랑이 스코필드 내한 100주년 기념사업 출범식에 정운찬 전 총리가 참석해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돈이 없어 학교를 못갔던 시절 스코필드 박사의 도움으로 학업을 마친 정운찬은 스코필드 내한 100주년 기념사업회 의장을 맡고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 스코필드 박사의 제자인 이삼열 교수가 스코필드 박사와 찍은 사진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기획/취재/편집: 서효심
촬영: 황금중
자료제공: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스코필드 내한 100주년 기념사업회
촬영협조: 서울 현충원,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
참고도서: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 34번째 민족대표라 불리는 스코필드 박사가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하는 2016년 3월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2016년 스코필드 박사가 내한 100주년을 맞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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