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천지TV=서효심 기자] 우리의 선조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 숭고한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며 일본에 맞서 투쟁했다.

그 시작을 알린 한마디.

‘대한독립만세’

일본의 쇠사슬에서 벗어나고자 일으켰던 3.1운동. 일본 군대의 제압으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때의 자유의지는 지금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맨주먹으로 용감하게 그들의 몸도 돌보지 않고 완강한 제국주의의 권위에 항거하여 자유를 요구하며 일어선 많은 군중을 본 그때의 정경은 나에게는 참으로 잊을 수 없는 눈부신 광경이었다.” -1962년 3월 2일 스코필드-

1919년 3월 1일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당시를 회상하며 쓴 외국인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의 글이다.

만세함성과 함께 터져 나오는 많은 인파들 가운데서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셔터를 누른 스코필드 박사.

박사가 카메라를 통해 본 한국인들의 모습은 참으로 위대했다.

그의 바람대로 3.1운동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민족운동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어떻게 이 기막힌 사진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일까.

▲ 독립운동가 스코필드 박사가 찍은 사진-일본군이 마을 전체를 불태워 잿더미로 변한 수촌리 마을 (사진제공:국가보훈처)

[제1화] 스코필드, 역사를 기록한 사진을 남기다

1919(기미년)년 2월 5일 매서운 칼바람이 불던 어느 날, 스코필드 박사를 찾아온 독립운동가 이갑성.

이갑성은 민족 33인 대표 중 한사람으로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를 앞두고 만세운동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해외에 알려 달라는 부탁을 하기위해 스코필드박사를 찾았다.

1910년부터 일제식민지배아래 있었던 우리 민족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포  뜨거운 독립의지를 품게 됐다.

민족자결주의: 어느나라 민족이든 그 나라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1918년 1월 윌슨대통령)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대한민국이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을 때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포 소식은 마른땅에 단비와도 같았다.
 
이때에 한국 교포들은 이번기회를 통해 한민족이 누구보다 독립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평소 남다르게 한국을 사랑했던 스코필드 박사는 친구인 이갑성의 부탁을 받아 역사적인 사진들을 카메라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3·1운동 초기의 몇 안 되는 사진들은 모두 그가 찍은 것이다.

▲ 독립운동가 스코필드 박사가 찍은 사진-불에타 무너져 내린 제암리 마을(사진제공:국가보훈처)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방화 학살 사건>

스코필드 박사의 셔터는 멈추지 않았다.

기미년 3.1 만세운동의 불길이 화성시 수촌리 마을에까지 번졌다.

마을 사람들은 밤새워 만든 태극기를 휘날리며 산 위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때 일본인 순사부장이 만세를 외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신들을 제압하려는 일본순사를 막기 위해 몰려들었고 무리들의 구타에 이기지 못한 일본순사는 결국 죽게 됐다.

이 일로 보복을 결심한 일본 경찰은 병사를 동원해 4월 15일 새벽 수촌리와 제암리 마을을 급습했다.

일본 부대는 수촌리와 제암리를 순식간에 집어 삼켰다. 집들은 모두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제암리로 들어선 일본 병사들은 30명이 넘는 죄 없는 청년들을 제암리 교회에 가둔 채 교회를 봉쇄하고 건물 전체에 불을 질렀다.

뜨거운 불길을 참지 못해 밖으로 나오려던 사람들은 총칼로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했다.

마을 청년들은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처참히 죽어갔다.

일본 총독부는 사건을 숨기기 위해 제암리 마을 근처에 헌병과 경찰을 배치하고 타지방 사람들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경계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스코필드 박사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억누르고 제암리 방화사건 현장을 어렵게 찾아 들어갔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사진을 찍기엔 너무나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양복저고리에 카메라를 숨기고 기회를 노린 박사는 마침내 잔혹한 사건 현장인 제암리 교회를 카메라에 담아냈다.

▲ 화성시 문화관광해설사 박대진씨가 독립운동가 스코필드 박사와 제암리 방화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인터뷰: 박대진/화성시 문화관광해설사]
“언더우드, 테일러, 스코필드 선교사들이 제암리 참상을 조사하러 가다가 4월 18일 경에 제암리를 목격 하게 된다. 그래서 스코필드 박사 일행이 제암리 참상 장암면 수촌리 사건 등을 기록해서 세계만방에 알리게 되는 거죠.”

제암리 마을에서 어렵게 찍은 사진은 스코필드 박사의 보고서와 함께 널리 국외로 소개됐고 일본의 포악상을 폭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사의 간절함이 빚어낸 결과다.

이렇게 그대로 묻힐 뻔했던 일본의 만행이 또 하나 드러나게 된 것이다.

2016년 3월 1일.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가슴 아픈 그날의 슬픔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방화사건 후 100년이 지난 제암리 마을의 공기는 아직도 차가웠다.

제암리는 그날의 일들을 잊지 않기 위해 3.1운동 순국 기념관을 설립하고 그곳에 제암리 교회 방화 사건을 기록한 사진들을 전시했다.

기념관을 들어서는 입구 한쪽에는 제암리 교회 방화사건 배경 설명과 함께 스코필드 박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인터뷰: 박대진/화성시 문화관광해설사] 
“스코필드 박사께서 그 사건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 마을, 이 지역을 방문을 하시면서 관심을 가지셨고, 보다 정확한 자료를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쓰셨던 거죠.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은 스코필드 박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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