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 칼럼니스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선거는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의회 선거다. 21세 이상 성인이면 신분과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진정한 의미의 선거였다.  5.10 제헌의회 선거는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반쪽짜리 선거였다. 이 때문에 좌우로 갈라져 대립했고, 북쪽에서는 3개월 후에 그들만의 선거를 치렀다. 경향신문은 5.10 선거 이틀 후인 1948년 5월 12일자에 ‘외신기자의 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당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수천명의 경찰과 특임된 민간인이 미국 군대 지원 하에서 각 중요 도로와 교차장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였으며 각 골목 입구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었다. 민간 경비대원은 도끼자루, 야구배트, 곤보 등을 휴대하고 있었고 모든 조선 경찰은 미국 카빈총으로 무장하였다. 선거일은 휴일이나 분위기는 계엄하의 도시와 같았다. (중략) 서울을 통하여 아동들만이 웃음을 웃었다.’

난생 처음 해 보는 투표라 어리둥절하기도 하였을 것이고, 경찰과 장정들이 총을 차고 도끼자루를 들고 지켜보고 있으니 겁도 났을 것이다. 그러니 ‘투표장으로 가면서 가만가만히 주의를 살피는 기색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도 각 시·도 등의 협의회 대표를 뽑는 선거가 있었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 선거도 있었지만, 일정한 금액 이상의 세금을 내거나 세대주만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선거는 아니었다. 

그 이후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난리가 났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 권력과 돈을 동원하고 불법과 편법, 폭력이 난무했다.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는 가장 극단적인 부정 선거로 오명을 남겼다. 선거에서 이길 자신이 없었던 이승만 정권은 대놓고 부정을 저질렀다. 3인조 선거도 그중 하나다. 3인 1조로 함께 기표소에 들어가는데, 그중 하나가 조장이다. 조장이 가운데 기표소에 들어가 좌·우 조원들의 투표 상황을 확인하는 것이다. 3인조들이 임무 수행을 잘 하려면 투표장이 소란하거나 사람이 몰려 통제가 힘들면 안 된다. 이를 위해 동네별로 투표 시간을 정해주었고 이 때문에 몸싸움이 벌어지는 등 전국의 투표장들이 소란스러웠다. 

3.15 부정 선거에서는 ‘4할 사전 투표’라는 것도 있었다. 주소지가 바뀐 사람이나 죽은 사람, 투표장에 나올 수 없는 노약자 등 선거 명부를 조작해 미리 4할을 만들어 놓았다. 선거 전날 밤 조작된 명부의 선거 용지에 기표를 한 뒤 다음 날 아침 일찍 투표함에 채워 넣었다. 3인조 투표, 4할 사전 투표 덕분에 자유당의 이승만 정권은 선거에 이길 수 있었지만, 4.19 의거로 붕괴되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관권 선거, 금권 선거는 끊이지 않았다. 고무신과 막걸리로 표를 사고, 돈으로 선거판을 뒤집고 여론 조작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렸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세상이 밝아졌다고 하지만, 별로 달라진 게 없다.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다. 이제는 저희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고 있다. 뭐가 부끄러운지, 뭐가 염치 있는 짓이고, 뭐가 국민에 대한 예의인지도 모르고 있다. 

속은 끓지만, 그럼에도 잘 살펴야 한다. 어느 것이 알곡이고, 어느 것이 가라지인지, 국민들이 판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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