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의정부 참찬 벼슬을 지낸 면우 곽종석은 퇴계 학맥의 유림 영남의 대표적 학자였고 심산 김창숙은 그의 제자였다. 두 사람이 주도한 ‘파리장서’ 사건은 조선 유림의 최대 독립운동 의거였다. 유림 대표들이 파리에 탄원서를 보내게 된 것은 3.1만세 운동 의거에 참가하지 못한 안타까움에서 비롯되었다. 김창숙은 3.1만세 의거 때 예수교, 불교, 천도교가 주도되고 유교가 빠진 것에 대한 한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유교가 나쁜 오명을 쓴 채 손을 놓고 앉아 있을 수만 없어 스승인 곽종석을 앞세워 파리장서를 준비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3.1만세운동이 국민들은 고취시켰으나 국제적인 호소와 활동이 없었다. 김창숙은 그 점을 생각하여 국제여론을 확대시켜 우리 대한제국의 독립을 인정받는 것이 3.1만세운동에 빠진 부끄러움을 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창숙은 전국 유림에서 가장 존경받는 종장격인 곽종석을 찾아 경상도 거창에 있는 다전(茶田)으로 급히 내려갔다. 병석에 누워 있던 곽종석은 김창숙을 반갑게 맞이했다. 파리장서에 대한 김창숙의 설명을 들은 곽종석은 “늙은 망국의 대부로서 늘 죽을 자리를 못 얻어 한스럽게 여겼는데, 방금 전국 유림을 이끌고 천하만국에 대의를 소리치게 되었으니 이제 죽을 자리를 얻게 되었도다.”라며 목숨을 바칠 각오로 기뻐했다고 한다.                 

파리장서는 몸이 불편한 곽종석이 먼저 짓지 못하고 문장이 뛰어난 경북 성주의 선비 장석영에게 대신 맡겨졌고, 자상하지 못한 사실적인 것은 곽종석이 보완하여 초안이 완성되었다. 곽종석은 조카 곽윤에게 정본을 쓰게 하고 그것을 메투리 날로 꼬아서 숨겨 가도록 김창숙에게 주었다. 조선의 유림 선비 137명이 서명한 파리장서를 몸에 숨기고 상해로 건너간 김창숙은 그곳에서 이동녕, 이시영, 신채호, 김구 등 독립 지도자들을 만나 향후 일정을 의논하였다.

파리장서는 영어, 독어,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수천 부를 인쇄시켜 김규식에게 보내어졌다. 파리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와 중국을 비롯한 세계 중요한 언론과 공관,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동시에 발송이 되었다. 파리장서는 세상을 놀라게 하고 일본과 조선 총독부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었다. 장서에 서명한 유림의 선비들은 속속들이 체포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진주 서곡에 사는 한 선비는 일본 경찰이 자신을 잡아가지 않자 주재소로 직접 찾아갔다. 그는 자신도 서명인인데 왜 잡아가지 않느냐고 따지자 경찰은 명단에 이름이 없다며 그를 돌려보냈다. 선비는 집으로 돌아와 아들을 불러 경위를 따지자 아버지의 지시는 받았으나 후한이 염려되어 서명하지 않았다고 했다. 선비는 서명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심히 부끄럽게 여겨 죽을 때까지 그 아들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고 했다.

곽종석은 일본 경찰에 잡혀 2년형을 선고 받고 대구 감옥에 있다가 병환이 심하여 병보석으로 출감되었으나 얼마 있지 않아 7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1만세운동 주동자 중 많은 인사들이 일제의 끈질긴 회유책에 넘어가 변절했으나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의 선비 137인은 악랄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선비의 기개를 지켰다.

3.1만세운동 의거에 못하지 않은 역사적 비중이 있음에도 파리장서를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숭고한 파리장서 사건을 제대로 알리고 장서에 서명한 유림의 137인의 선비 정신을 이어 받아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거듭나야 하겠다.

파리장서를 알리는 기념비가 경상남도 거창에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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