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손탁 여사의 마지막 거처, 손탁 여사 (자료출처: 왈츠와 닥터만커피박물관), (아래)손탁호텔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궁 내부서 황실음식·의전 담당

뛰어난 친화력·외국어 실력으로

고종·명성황후에게 신임 얻어

재산 잃고 객사했다는 등

분분했던 마지막 생애 밝혀져

평안한 말년 보낸 후 생 마감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영화 ‘암살’의 오프닝에서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이 벌어지는 장면의 장소는 손탁호텔이다. 손탁호텔은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 이화 백주년기념관 자리에 있던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다.

한국 커피역사의 태동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손탁호텔을 운영한 앙투아넷 손탁(Antoinett Sontag, 1854∼1925)의 마지막 거처가 확인됐다.

왈츠와 닥터만커피박물관(관장 박종만)은 “고종의 후원을 받아 손탁호텔을 운영했고, 외국 고위 사절과 조선 황실의 외교통로 역할을 하며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진 손탁의 정확한 말년 거처 위치를 확인했다”고 2일 밝혔다.

1909년 황실전례관을 그만 두고 조선을 떠난 손탁의 마지막 생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분분했었다. 생몰연대도 25년으로 알려지는 등 불분명했으며 러시아에서 전 재산을 잃고 쓸쓸히 객사했다는 설도 돌았다.

지난 2015년엔 가을 김영자 독일 레겐스부르크대 박사가 손탁이 프랑스 칸에서 생을 마감한 것을 확인했다. 이 소식을 접한 박종만 관장은 칸을 직접 방문해 손탁이 당시 말년을 보내는 다른 유럽의 부호들처럼 평안하게 생을 마감한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왈츠와 닥터만커피박물관에 따르면 박 관장은 손탁의 사망신고서와 묘지를 확인했다. 또 박 관장은 김 박사가 찾지 못한 손탁의 마지막 거처 아네모네 맨션을 확인했다. 아울러 이전에 공개된 적 없었던 사진도 입수했다.

박종만 관장은 “손탁의 생을 조명할 수 있는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사료로 역사의 퍼즐을 맞춰가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역 알사스 지역 출신의 손탁은 1885년 러시아 초대 공사였던 ‘베베르’의 처형으로 서울에 첫발을 디딘다. 당시 32세의 그는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역 알사스 지역 출신답게 독일어, 불어, 영어가 능통했다.

1896~1909년 손탁은 ‘베베르’의 추천으로 황실음식(양식요리)과 의전을 담당하는 궁내부 소속 ‘황실전례관’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조선에서 10년을 지내면서 우리말까지 능숙하게 구사했다.

‘경성부사’ 제1권의 기록을 보면 손탁에 대해 “뒤이어 누차 왕비에게 불려가서 서양사정에 대한 얘기 상대가 되었다. 그녀는 재기 발랄하여 영·불어 및 조선어에 숙달하여 왕비는 물론이고 드디어는 고종마저도 안내 없이 지척에 갈 수 있기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뛰어난 친화력과 외국어 실력으로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신임을 얻어 고종에게 정동에 있는 한옥 한 채를 받게 되는데 이곳이 친미개화 세력의 구심이었던 ‘정동구락부’의 모임 장소로 이용됐다. 정동구락부를 모체로 한 ‘독립협회’가 발족한 뒤 독립관을 건립하기까지 주요 인사들은 이곳에서 항일운동을 모색했다.

이후 손탁은 1902년 러시아식 2층 건물로 호텔을 짓고 개업한다. 손탁호텔은 서양 문물에 익숙한 한국의 유력 정치인과 명망가, 외국인들의 사교의 장이었고, 황실 손님이 주로 묵는 숙소로 사용했다. 하지만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고 러시아 세력이 위축된 뒤로 명맥만 유지하다 1905년 을사조약의 배후를 조종한 이토 히로부미가 머물기도 반전의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얼마 전까지 일반인을 대상으로 처음 커피를 판매한 곳으로 알려졌으나 대불호텔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최초 커피 판매점이라는 호칭은 잃어버렸다. 그러나 손탁호텔은 여전히 한국의 커피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며 손탁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