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관순 열사 영정 (사진제공: 천안시)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김예슬 기자]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

유관순 열사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한 여성 독립운동가다.

당시 18세의 어린 나이였던 유관순 열사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각오를 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목 놓아 외쳤다. 결국 그는 아우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열사는 매질과 온갖 고문 속에서도 자주 독립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수감 중에도 독립만세를 외치며 옥중 동료들을 격려했다. 결국 1920년 9월 28일 열사는 꽃다운 나이인 19세로 생을 마감했다.

열사가 독립운동을 한 데는 부친의 영향도 컸다. 열사의 부친인 유중권 선생은 기독교에 구국의 신념과 방도가 있음을 깨닫고 교회를 세워 민중 계몽운동에 노력했다. 유중권 선생과 모친 이소제씨 역시 열사와 함께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순국했다.

열사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활달하며 남자 못지않은 배포가 있었다고 한다. 또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한편으론 조카를 위해 뜨개질을 하는 등 소녀다운 면도 있었다.

3.1운동 발발 당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이날 학교 담을 넘어 탑골공원까지 나가 만세를 부르고 돌아왔다. 이후 3월 10일 조선총독부의 임시휴교령 내려지자 고향으로 내려와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이다.

당시 열사는 정오가 되자 대중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우리에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놈들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 사람들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0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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