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화학당 총교사 시절의 김란사 여사. 드레스를 입고 있다. (사진제공: 친정조카손자 김용택씨) ⓒ천지일보(뉴스천지)

우리나라 여성 최초 美학사 학위 취득
대학 졸업 후 이화학당 교사로 지내며
기혼여성들에게까지 배움 기회 제공
‘호랑이 선생님’이라 불릴 정도로 엄격
日침략 부당함 알리러 가다가 타계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우리가 배우지 못해 캄캄한 게 이 등불 꺼진 것과 같으니 우리에게 밝은 학문의 빛을 열어 주세요.”

19세기 후반, 조선에 신문물이 들어오고 유교적 관습에 매여 있던 여성들도 교육을 받을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1886년(고종 23), 조선에 파견된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일행 중의 한 사람인 메리 F. 스크랜튼(Mary F. Scranton)에 의해 세워진 이화학당이 바로 조선 여성 교육 기관의 출발이었다.

해가 지고 어두 캄캄한 어느 날 밤, 사방등을 앞세우고 한 부인이 이화학당 교사 프라이(Lulu E. Frey)를 찾아 왔다. 부인은 입학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이화학당 초창기와 달리 당시는 학당을 찾아오는 학생이 늘어나 기혼 여성까지 받아줄 순 없었다. 부인은 완고했다. 갑자기 사방등을 끄고 말했다.

“선생님, 우리나라는 마치 이 불 꺼진 등잔 같이 어둡습니다. 어머니들이 무엇인가 배우고 알아야 자녀들을 가르칠 것 아닙니까. 학문의 빛을 밝힐 기회를 주세요.”

부인의 확고한 의지와 깊은 뜻에 감동한 프라이 학당장은 입학을 허락했고, 행동이 대범했던 이 부인은 1894년 이화학당에 입학해 공부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미국 학사 학위(B.L.)를 받은 김란사(하란사) 여사. 그의 이화학당 입학에 얽힌 이야기다.

◆신여성, 배움의 큰 뜻 펼치다

▲ 미국 웨슬리안대학교 입학 당시 (사진제공: 친정조카손자 김용택씨) ⓒ천지일보(뉴스천지)

1893년에 인천감리 하상기와 결혼, 여성도 교육받을 길이 열리자 1894년에 이화학당에 들어가 배움을 이어갔다. 이후 일본 동경 경응의숙(게이오대학)에서 1년간 유학하고, 1900년부터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학에서 6년간 수학했다. 당시에는 전공학과가 없었기에 김란사는 주로 영어성경 과목에 집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6년이나 대학을 다닌 것은 아카데미 디파트먼트(Academy Department) 예비과정을 3년이나 수학했기 때문이다. 1905년에 시니어(Senior)로 문학 전공과정을 이수하면서 1906년에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B.L. Bachelor of Literature)를 받았다. 

김란사는 1872년(고종 9)에 평양에서 전주 김씨 김병훈과 이씨 부인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평양에서 경성(당시 서울)으로 이주해 서울 평동 32번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부모님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아버지의 무역업을 도우며 자랐다.

‘김하란사’라는 이름도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남편 성을 따르는 외국 문화에 따라 남편 성을 이름에 같이 사용하게 된 것이다.

▲ 웨슬리안대학교 기숙사 (사진제공: 친정조카손자 김용택씨) ⓒ천지일보(뉴스천지)

그는 이화학당 총교사 겸 기숙사 사감뿐만 아니라 1911년부터 매일학교, 애오개여학교, 종로여학교, 동대문여학교, 동막여학교, 서강여학교, 왕십리여학교, 용머리여학교, 한강여학교에서도 지도교사를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호랑이 선생님’으로 불릴 만큼 교육에 있어 엄격했다는 김란사. 유관순 열사도 김란사의 제자로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김란사의 신여성 교육에 대한 열정은 남편이 하인을 보내 끼니를 챙길 정도였다는 이야기로도 짐작할 수 있다. 

웨슬리안대학 졸업 후 귀국한 그는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1907년부터 감리교 상동교회(남대문)에서 여성들에게 영어와 성경을 교육했다. 배움의 기회가 많지 않은 기혼 여성들을 위해 교회에서 마련한 영어학교였다. 학교는 이후 감리교협성여자신학교에서 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이 됐다.

1911년에 김란사가 기고한 영문선교잡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두 가지 가정 일에 대한 불평이 타당하다고 인정할지라도 다음 사실만은 꼭 알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정규 고등학교 졸업생이 그저 요리나 바느질하는 법을 알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그 학교들의 목적과 방향은 슬기로운 어머니, 충실한 아내 및 개화된 가정주부가 될 수 있는 신여성을 배출하는 것이지 요리사나 간호원,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김란사는 개화파 윤치호(출소 후 친일파 됨)가 한국에서의 여성 교육을 비판하는 내용에 반박하고자 이같이 기고했다. 여성 교육의 목적은 슬기로운 어머니, 나라를 위해 훌륭한 자식을 키울 수 있는 어머니, 능력 있는 여성을 배출하는 것에 있다는 게 김란사의 확고한 뜻이었다.

김란사는 단순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의 위기 상황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던 그다. 그러니 여성도 배워야 하며, 더 나아가 자주독립 국가를 이루기 위한 항일독립운동에 그의 뜻은 향해 있었다.

▲ 성경책을 들고 있는 김란사 여사. 김란사가 유학할 당시 미국 웨슬리안대학에는 전공학과가 없었다. 그래서 문과 개설 전까지는 영어성경 과목에 집중했다. (사진제공: 친정조카손자 김용택씨) ⓒ천지일보(뉴스천지)

당시로써는 영어 실력이 능통해 고종의 통역도 맡아 독립운동의 연락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고종의 아들 의친왕을 파견해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부당함, 조선의 억울함 등을 알릴 계획이었으나 고종이 승하하면서 직접 가게 됐고, 비밀 파송 중 북경에서 교포들이 마련한 만찬회에 참석했다가 1919년 4월 10일 갑자기 생을 마감했다. 일각에서는 먹은 음식이 잘못됐다고도 하고, 일본이 보낸 첩자에 의한 독살로 추정하고 있다.

여인의 몸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품고 오직 나라를 위한 마음뿐이었던 김란사. 엄격하게 제자들을 훈육하며 여성도 조선 독립을 이루는 데 큰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한 그는 참 스승이었다.

한편 그동안 김란사의 출생연도와 일대기의 일부 내용에 대해 잘못 알려져 왔다. 친정조카 손자인 김용택씨는 약 2년간의 자료 발굴 및 증언 조사 등을 토대로 김란사의 연보를 다시 정리, 본지에 그 사실을 알렸다.

그는 “할머니의 출생연도가 1875년이라고 알려졌지만, 1872년이 맞다. 또한 김해 김씨가 아니라 전주 김씨다. 기생이었다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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