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 시인

 

일요일 아침 느긋한 마음으로 컴퓨터를 켜고 ATIV-TV를 봤다. 국회방송에서는 낭랑한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는데 아직도 필리버스터가 진행되고 있다. 몇 번째인가 보니 벌써 스물두 번째의 순서다. 지난 23일 오후 7시 5분경, 43년 만에 국회에서 필리버스터가 재개되고서 첫 주자로 나선 김광진 의원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테러방지대책에 관해 설명했다. 현행 정부의 테러대비책으로 ‘국가대테러활동지침(대통령훈령 제337호)’이 운용되고 있지만 정작 지침상 당연직 대책위원장인 국무총리는 그 지침이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필리버스터(filibuster)’란 용어가 인터넷 실시간 검색 상위에 오르는 등 국민 관심을 받고 있다. 오래전에 필자가 일반상식 책자에서 익혀온 이 용어를 ‘의회에서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이뤄지는 의사진행 방해 행위’로 막연하게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TV방송으로 생중계되는 실시간 내용을 체험하게 됐다. 일부 언론에서는 국회 본회의장의 무제한토론에서 정청래 의원이 11시간 39분간 발언해 신기록을 세웠다느니 흥미 위주 기사로 쓰고 있지만 토론에 나선 의원들은 나름대로 대의민주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필리버스터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테러방지법’이라 불리는 이 법의 제목은 지난 2월 22일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안(이하 테러방지법)’이다. 본문 19조 부칙 2조로 된 테러방지법은 정상적 입법 절차인 정보위원회, 법사위원회의 여야 합의 없이 새누리당의 일방처리로 본회의에 넘어오자 정의화 국회의장은 비상사태임을 빌미로 2월 23일 직권 상정했다. 이에 비상사태도 아니고 위법상정 됐음을 주장하는 야당이 제도상에 보장된 필리버스터를 이용해 본회의장 무제한토론에 나서 이 시간까지 벌써 6일째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테러방지법은 필요한 법이다. 야당의원들은 현재 대통령훈령 형식의 ‘국가대테러활동지침’이 존재하고 그 내용도 잘 정비돼 있으나 운영권자인 국무총리 등이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며 질책했다. 이 지침대로 잘 이행하면 된다는 주장이고, 만약 실효적인 입장에서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면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 내용에서 인권침해 요소가 있는 부칙 규정을 없애야 한다며 새누리당에게 독소 조항의 삭제를 요구중인데,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오랜 기간 테러방지법이 왜 제정되지 않고 있느냐에 대해 정치권이 깊이 새겨볼 대목이다.           

우리나라에서 테러방지제도의 태동은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이미 있어왔다. 그해 9월 11일 미국 뉴욕에서 ‘9.11테러사건’이 발생되자 이를 기화로 그달 21일, 이한동 국무총리가 주재한 관계장관회의에서 테러방지법 제정 필요성이 제기됐고, 국무회의 의결과 대통령 재가를 받아 11월 28일 국회에 법안이 제출됐다. 하지만 당시 이 법안은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어긋나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요소가 있으며, 국가정보원에 대테러센터를 두고 테러업무를 총괄 수사토록 하는 것은 과도한 권한 집중이어서 견제와 균형이라는 권력배분의 원칙에도 어긋난다는 이유 등으로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고 폐기된 바 있다.

이번에 상정된 테러방지법에서는 국가테러대책위원회와 대테러센터는 국무총리 소속으로 변경됐지만, 국가정보원장이 테러위험 인물에 대한 출입국·금융거래 정지 요청 및 통신이용 관련 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했고, 부칙 제2조에서 국가정보원장이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 통신비밀보호법 등 관련 조항 개정을 규정하고 있는 바, 이에 대해 필리버스터에 나선 야당의원들은 이 조항들이 국민의 기본권을 심히 위축시키는 독소 조항이라 규정하고 수정요구하고 있으며 여야 합의로 법을 만들어 국민안위를 지켜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주주의의 경험 장(場)인 우리 국회에서 필리버스터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새누리당은 ‘IS·북한의 테러위협은 증가하는데 테러방지법도 못 만드는 국회’임을 내세우며 피켓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야당이 국가정보원의 감청과 금융정보분석원을 통한 정보수집권 등은 독소조항이라며 이 규정을 제외한다면 법 제정에 합의할 수 있다는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안을 고수하고 있다. 국정원 실체와 함께 대통령 발언을 지적하는 등 야당의 무제한토론이 계속되게 하는 일련의 사태는 ‘여야 합의’ 정신의 소멸이자,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생각도 든다.   

알카에다, 탈레반 등 79개 UN지정 국제테러단체가 있는데다가, 북한 위협이 가중될 상황에서 현행 지침보다 테러방지법 제정은 실효적이다. 하지만 2001년 말 이후 지금까지 14년 동안 법 제정 논의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 침해’를 우려해왔던 점을 감안해 국민여론과 사회적 합의가 충분히 수렴되고, 민주적 절차성이 보장된 테러방지법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실을 바늘허리 매어 쓰지는 못할 테고, 급히 먹은 음식이 체하는 법이 아닌가. 이번 필리버스터는 실시간으로 국민의 의사를 대변시킨 ‘양방향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열어준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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