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규태 화가의 ‘서궐도’. 고려대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서궐도안’을 바탕으로 동궐도의 채색을 참조해 경희궁의 모습을 나타냄 (사진제공: 서울역사박물관)

숙종·영조·정조 때 전성기 누려

일제강점기 지나면서 초라해져

현재 일부 전각만 복원된 상태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 내달 13일까지

‘영조 어필’ ‘반달연못’ 감상

宮 사랑한 왕들 마음 느껴져 

[천지일보=김예슬 기자] ‘창덕궁에는 금까마귀가 빛나고, 경희궁에는 옥토끼가 밝도다.’

이는 영조가 쓴 글이다. 경희궁에 대한 애착이 담겨 있다. 경희궁은 ‘경덕궁’ 혹은 ‘서궐’로 불리며 조선 후기 많은 왕들의 사랑을 받았다.

경희궁은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의 집터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유로 광해군에 의해 건설됐다. 그러나 광해군은 경희궁에 살아보지도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쫓겨났고 숙종, 영조, 정조 집권기 초반까지 최전성기를 누렸다.

경희궁이 초라해지기 시작한 건 경복궁 중건을 하면서부터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현재 새로 복원된 전각 몇 채만이 경희궁터에 복원돼 시민에게 공개되고 있다.

많은 왕들의 사랑을 받으며 최전성기를 누렸던 경희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경희궁의 흔적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오는 3월 13일까지 1층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전 ‘경희궁’을 진행한다.

경희궁은 1865년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면서 많은 전각이 헐려나갔다. 빈터는 명례궁 등 4개의 궁에 토지로서 분배되고 뽕나무가 심겨지는 등 궁으로서의 위상이 사라졌다. 그런 경희궁에 또 한 번의 아픔이 찾아왔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일본인 관료 자재들의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경희궁 터에 들어섰다. 궁의 동쪽 부지엔 총독부 관사가 건설됐다. 당시까지 경희궁에 남아있던 흥화문도 1933년 박문사의 정문으로 바뀌는 등 궁으로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현재 열리고 있는 전시에선 사랑받던 경희궁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최전성기의 경희궁을 그린 서궐도안(보물1534호)을 비롯해 궁중기록화 다수가 전시되고 있다. 특히 서궐도안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에 비견되는 그림으로 전경과 주변 경관을 실감나게 그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서궐도안’과 숙종의 시 ‘춘화정 반달연못을 바라보며’라는 시에 등장하는 연못의 복제물도 재현된다. 반달 모양인 이 연못은 현재 성곡미술관 입구 한 켠에 있다. 이는 이번 전시 준비과정에서 현장조사를 하던 중 숙종 당시 유물임이 밝혀져 의미를 더한다.

이 밖에 오랫동안 경희궁을 지킨 돌거북 석조물도 전시됐다. 영조의 어필 글씨도 이번 특별전에 소개되고 있다. 영조는 재위기간 중 8회에 걸쳐 19년 동안이나 경희궁에 임어하고 글을 짓고 대자의 어필로 남겼을 만큼 경희궁을 사랑했다.

왕들의 경희궁에 대한 사연은 가지각색이다. 정조는 경희궁의 가장 높은 곳에 소나무 두 그루를 심고 ‘송단’이라 일컬었다. 그는 이곳에서 시를 읊고 경치를 감상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영조는 육상묘(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가 보이는 영취정에 올라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숙종은 춘화정을 만들고 관악산을 바라보며 꽃놀이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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