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으로 지켜낸 구구의 신념

[천지일보·천지TV=서효심 기자] 조희제는 꼼꼼했다. 각지에 있는 야사들을 모아 비교 분석하며 최대한 많은 내용들을 책에 담으려 노력했다.

(야사: 개인이 지은 역사 서적)

항일운동으로 잡혀간 의병들의 심문기록 뿐 아니라 법정에 직접 참석해가며 재판과정까지 기록하려 했으니 염재야록 편찬에 얼마나 열성을 다했는지 알 수 있다.

조희제는 값으로 치기 힘든 세월과 시간을 염재야록 편찬에 쏟아 부었던 것이다.

마침내 1934년 ‘염재야록’이 완성됐다.

“그런데 이는 옆 사람이 듣게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형과 나도 큰 소리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재앙의 빌미는 담장 안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했습니다”일제 식민지배 아래 선생처럼 야사를 쓰는 일은 목숨을 건 승부와 같았다. 때문에 이일에 동참했던 사람들의 염려도 적지 않았다.

“여하튼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있을까 걱정될 따름입니다. 이 종이를 불에 태워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염재야록 편찬 전 발문을 부탁받은 고재 이병은이 보낸 서찰이다.  
 
선생은 염재야록 편찬 사실을 숨겨야만 했다.

그러나 1938년 겨울, 염재야록 편찬사실이 발각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제 경찰은 선생 집에 들이닥쳐 사랑채에 숨겨져 있던 모든 문집 등을 모조리 압수해 갔다.

선생은 임실경찰서에 잡혀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 조희제 선생의 후손인 조종래씨. ⓒ천지일보(뉴스천지)

[인터뷰: 조종래 / (81세) 조희제 선생 후손]

“임실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어 그러다가 고문을 받고 다 죽어가니 
경찰서에서 일본놈들이 내던져 버렸어 덮어놓지도 않고 버려뒀으니 
경찰서 옆집에 머슴이 아침에 논밭에 가던 중에 사람이 하나 경찰서 옆에 죽어져 있으니
얼굴을 보니까 낯이 익은 얼굴이라 주인한테 얘기를 했지 
앞에 가니 아는 듯 한 분이 죽어있더라 많이 맞아가지고 그러니까 그 집안에서 나와 보니까 아는 사람이니까 그 집 달구지로 싣고 온거여 여기까지“

“구금을 당해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를 맞아 쇠한 몰골의 늙은 몸이 고슴도치와 거북이처럼 오그라들었다. 다른 이들은 그 혹독함을 견디기 어려웠는데, 오직 조희제 님만은 눈밭의 푸른 솔처럼 분기탱천하며 늠름한 모습이었다. 평소 쌓은 배포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열흘 남짓 옥고를 치르면서 억울한 심정이 더욱 깊어져 결국 병이 되어 목숨이 거의 끊어질 뻔했다” 함안조씨세보

열흘 남짓한 고문과 심문으로 목숨이 거의 끊어질 지경에 이른 조희제 선생은 임실경찰서 앞 논밭에 처참히 버려진다.

매서운 바람과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의식을 잃어갔다.

[인터뷰: 조종래 / (81세) 조희제 선생 후손]
“한 일주일동안 집에 있는 동안 정신이 돌아왔는데 
또 데리러 왔어. 고문 하려고, 살았으니까..
또 고문을 해야지.
그래서 데리러 오니, 옷 따뜻하게 갈아입고 나가려고 하니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해놓고 자기가 간직했던 독약을 머고 돌아가신 것이야“

“상투를 잘라 목숨을 늘리는 짓은 나는 하지 않겠다. 우리 도리로는 그러한 치욕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의리를 지키다가 죽어야 마땅하다” -조희제-

그렇게 염재 조희제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죽음과 함께 염재야록의 행방도 희미해져갔다.

그러나 1950년.

조희제의 첫째 아들 조형래 이름으로 염재야록 석인본이 발행됐다.

어떻게 된 것일까.

염재야록 편찬 사실이 발각될까 염려하던 조희제 선생은 발각될 것을 예견이나 한 듯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책 표지를 염재야록이 아닌 ‘덕촌수록’이라 지었고 책은 궤짝에 넣어 땅속에 묻어뒀던 것이다.

▲ 조희제 선생 후손 조현몽씨가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절골 뒷산에 있는 조희제 선생 비에 쓴 글을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1945년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후 염재야록 편찬을 함께 도왔던 조현수의 도움으로 땅 속 염재야록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인터뷰: 조현몽 / (76세) 조희제 선생 손자]
“비닐이 없으니 한지나 이런 것을 싸서 그래도 마루 밑에 묻어야 불이 나도 안타고 습기도 덜 차 
안전하기는 거기가 낫다 해서 마루 밑에 숨긴 것이야 
염재야록 한권도 작은 아버지 한테 준거야. 조카니까 6.25때 꽉 끼고 다니면서. 다른 건 다 버렸어도 그것은 안 버리고 항상 할아버지 유물이니까 기가막히는 거여. 
꼭 가지고 다니면서 6.25를 겪었어. 그래가지고 이 일을 한다고 하니까 손자 조현직이한테 
내가 작은 아버지한테 한권 있다고 하니까 바로 가서 빌려달라고 할아버지 일 좀 하려고 한다고 해서 줬어. 그래서 세상에 공개가 된 거야.”

염재야록은 1895년 을미사변과 의병활동, 1905년 을사늑약의 전말, 1907년 최익현, 안중근, 임병찬, 기우만 등 애국지사들의 전기(傳記), 1910년 한일합병의 전말 등 1918년까지 애국투사들의 절의실적(節義實蹟)을 기록하고 있다. 
(절의실적: 절개와 의리, 나아가 이를 지킨 사람의 행적 )

1950년 발행된 염재야록은 집필된 지 50년이 지나도록 빛을 보지 못했다. 집필자인 조희제 역시 사람들에게는 낯선 이름일 것이다.

어쩌면 잊혀 질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생의 딸이자 광복회 전북 지부장이었던 조금숙 여사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마침내 2016년 독립운동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2016년 1월 28일 임실군청, 독립운동가 조희제 선생의 공훈 학술강연이 열렸다.

이곳에서 조희제 선생의 후손들을 만날 수 있었다.

▲ 조희제 선생 손녀 조미자씨. ⓒ천지일보(뉴스천지)

[인터뷰: 조미자 / (75세) 조희제 선생 손녀]

상투를 끊으라고 했는데 그것도 안하고 일본 놈들이 준 것은 물도 안 드셨데..절대 안 먹는다고 하고 옥살이 하는 데 가서 기록을 다 해서 우리 집에 사랑채가 있거든
거기다가 숨겨 놨는데 그것을 누가 일본사람한테 고발을 해서..
(둘째 손자 조현성: 집안에 누가 시기를 해서..)

농촌에서 약 같은것 심어서 그것을 팔아서 
독립운동했던 가족들한테 다 베풀고 다녔어

▲ 조희제 선생 손자 조현국씨. ⓒ천지일보(뉴스천지)

“나는 90살 까지 살거라고 그러더라고..”
 

인터뷰: 조현성 / (66세) 조희제 선생 손자]

“이제 다 가시고 안계시지만
고모님이 그래도 좀 오래 사실 줄 알았더니..”

그러나 조희제 선생의 딸 조금숙 여사는 보이지 않았다. 지난 4일 갑작스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조희제 선생의 행적들을 모아 마침내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올린 조금숙 여사.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독립운동가 조희제 선생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노력 또한 끈질긴 신념으로 염재야록 편찬을 완성한 조희제 선생을 닮아있었던 것은 아닐까.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절골 뒷산에는 독립운동가 조희제 선생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비 앞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조희제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 한눈에 담긴다.

마치 선생이 이 곳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 했다.

[인터뷰: 조현몽 / (76세) 조희제 선생 손자]
“조금숙 회장이 살아 생전에 유골은 대전현충원에 모시고 
비는 땅에다 묻기도 아깝고 돈 들여서 했는데 그냥 이대로 세워놨지. 
비는 셋째 아들(조 은)이 세웠다”

지금은 대전 현충원에 안치돼 있다.

▲ 대전 현충원에 세워진 독립운동가 염재 조희제 선생의 묘비. ⓒ천지일보(뉴스천지)

기록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염재 조희제 선생.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기록은 우리들이 반드시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들을 후대를 위해 남겨 놓은 작업이다.
그 의미는 단순히 책 한권을 뛰어 넘어 시간과 시간을 이어주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그가 목숨을 걸고 기록한 ‘염재야록’ 
붓으로 지켜낸 구국에 대한 그의 신념이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되고 있다.

지금은 번역조차 되지 못해 그 내용이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반드시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기획/취재/편집: 서효심
촬영: 황금중
자료제공: 국가보훈처 
촬영협조: 독립기념관, 서대문형무소, 대전 현충원

 

▲ 독립운동가 조희제 선생, 붓으로 지켜낸 구국의 신념 조희제 선생 역사기획.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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