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잎(松葉) 이윤구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큰 추위(大寒) 절기의 마지막 몸부림을 뼛속까지 느끼게 하는 정월 29일 새벽이었습니다. 그러나 해가 뜨면서 차츰 입춘(立春)을 몰고 오는 남녘 바람이 광화문 거리를 따사하게 안아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오후 2시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어쩌면 백 년에 한 번이나 있을까 말까 한 감격스런 모임이 있었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 기념 사업회 창립총회가 막을 올렸습니다.

망해가던 나라의 진통과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겨레의 애통 속에서 푸른 소나무와 곧은 대나무처럼 한반도와 한민족을 그 넓고 깊은 가슴에 껴안고 불굴의 초인적 지도력을 보이시며 살다 가신 서천 한산인(舒川 韓山人) 이상재 선생(1850~1927)을 이 무심한 나라와 무례한 겨레는 너무도 기인 세월을 월남을 잊고 잃은 채로 지나왔습니다.

일본 침탈의 암흑시대에야 어쩔 수가 없었지만 8.15 광복 후에는 월남을 기리고 그 정신을 다시 배우고 님의 ‘한마음’ 정신을 대대로 물려주는 기념사업이 시작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6.25의 참담한 동족상쟁으로 한반도가 피바다로 붉게 물들고 반만년 민족역사가 쇄진하는 위기가 왔을 때에라도 월남의 ‘한마음’ 혼에 새 불씨를 붙여야 했습니다. 잿더미로 변한 종로의 기독청년회 건물을 다시 세울 때에도 우리는 물질만능의 시대사상에 포로가 되어 월남 선생님의 정신 ‘한마음’의 회복을 진지하게 논의하지 못했습니다.

산업혁명과 민주화 그리고 선진국 대열에 동참하는 엄청난 소용돌이를 용케 이기고 21세기 새 아침이 밝은 지도 10개 성상이 되는 이 새해 아침에야 월남 이상재 선생님을 기념하는 사업들을 꿈꾸고 실현해 보기 위해 500여 명의 뜻있는 사람들이 자리를 같이하고 세종홀을 꽉 메웠습니다. 모임은 시작부터 숙연하고 근엄했습니다. 월남이 숨을 거두신 지 83년 만인데 어찌 아니 그러하겠습니까? 저는 복바치는 눈물을 머금느라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대표회장으로 추대를 받는 순간 제 몸은 피부 속으로 강렬한 전류를 느끼고 전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목이 메어 취임인사를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아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저는 부끄럽고 떨림으로 민족사의 법정에 서 있는 죄인처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우리나라와 겨레가 83년이나 미루고 방치해 왔던 사업을 이제야 시작하는 잘못의 죄책감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일어설 힘이 전혀 없습니다.”

“해방 이후부터 철이 들고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기 시작한 50년대부터 너무도 많은 이 땅의 지도자들이 말로만 월남기념사업회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외쳐왔는데 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저 자신을 주범, 중범자로 빼놓을 길이 없습니다.”

“어쩌다가 월남 할아버님보다 몇 해 더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는 까닭이 어쩌면 이 뜻깊은 모임을 시작으로 활발하게 ‘한마음’ 정신을 목이 메게 가르치고… 8천만 한겨레가 온 누리 구석구석에서 월남 선생님의 사진과 초상화, ‘한마음’ 정신의 깃발을 높이 들고 68억 인간 가족을 ‘한울, 하늘 마음, 하나의 마음, 하나 되게 하는 혼’으로 이끌고 나가게 될 날을 상상해 봅니다. 가슴이 뜁니다. 피가 끓습니다.”

월남 선생의 한마음 정신은 님의 고매하신 인격 위에 나라와 겨레 그리고 누리를 꿰뚫고 일관하는 우주, 한울, 하늘의 마음을 체험하신 종교적인 인품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계속)

※월남 이상재(李商在, 1850~1927년)는 한국의 개화운동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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