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 시인

 

오래전 이야기다. 필자가 정당에 몸담고 있을 시절, 정부입법을 관장하는 행정부의 법률해석단장과 ‘정당(政黨)’에 관해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단장은 내게 정당조직을 ‘제2의 정부(政府)’라는 소견을 말해준 바 있는데, 정당조직이 준(準)정부적 성격인지 아니면 당헌 구조가 그렇다는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았다. 바른 뜻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얼마쯤 지나서 영국의 정치학자 브라이스(Bryce)로 인해서다. 브라이스는 정당을 가리켜 “법률상의 정부에 지배권을 행사하는 제2의 비법률적 정부”라 설파했던 내용을 책에서 찾았던 것이다.

정부가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행정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정부에 대한 지배권 행사는 어렵다. 하지만 정부가 하는 일에 정당, 시민단체, 일반국민들까지 여러 곳에서 의견을 내놓다보니 정부정책의 투입과정에서 그 의견들이 반영됨은 현대정치의 당연한 귀결이니 외부작용을 도외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외부작용 가운데 정부의 공동운명체라 할 수 있는 여당의 입김이 정부의 지배권으로 흘러드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이다. 그러한 일말의 일들은 브라이스의 정치이론과 실제적인 행동에 따르면 더욱 명확해지는 바 “정당은 정권(政權)을 장악하고, 장악한 정권을 유지하는 데 주목적이 있다”는 말인즉, 정당정치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늘날 정치는 정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이라 하면 흔히 국회의원을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국회의원이 국민의 대표자이긴 하나 정당에 소속된 관계로 당원으로서 당헌·당규에도 충실해야 한다. 무소속이 있지만 어느 정당에도 소속되지 않아 무소속(無所屬)이라 칭하는 근저에는 정당정치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헌법 제8조에서 정당의 설립의 자유와 복수정당제를 보장하고 있으며(제1항), 정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와 함께 정당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보조받도록(제3항)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정당은 민주정치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라고 하지만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정당의 당헌·당규를 살펴보면 나라의 법률을 만드는 국가기관인 국회의원들이 만든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다. 현재 20개 정당이 당헌·당규를 제정해 운용하고 있다. 특히 원내정당인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의 당헌을 보면 허점들이 보인다. 내용이 각기 다름은 정당이 지향하는 바 강령이 달라서이지만 세부내용에서 일정한 룰을 따르지 않아 들쭉날쭉한데, 정당의 당헌·당규는 국가의 헌법·법률과 마찬가지로 잘 정비돼 있어야 부작용이 없이 발전될 수가 있다.

현재 새누리당에는 당헌(113개조)과 당규 48개 규정이 있고 더민주당은 당헌(127개 조문), 당규 18개, 정의당은 당헌(68개 조문), 당규 17개 규정이 있다. 또 지난해 당헌 개정횟수를 보면 새누리당은 없었고, 더민주당은 5차례, 정의당은 두 차례였다. 정당 가운데 새누리당 당규수가 48개로 가장 많지만 당헌의 권력구조 중 대표최고위원 궐위 등과 관련해 일부 입법미비(立法未備)가 보이고, 더민주당 당헌은 지난해 다섯 번 개정하고 올해 들어서도 개정했다. 짧은 기간 내 개정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정당의 근간이 안정화가 돼 있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국가 법률이나 정당의 당헌은 기본적인 구성 체계를 따른다. 어느 정당의 당헌을 보더라도 맨 먼저 총칙이 있고, 실체 규정, 보칙(補則)과 부칙으로 구성된다. 당기구 등 핵심내용들은 실체 규정에서 정하게 되고, 보칙은 실체 규정을 이행하거나 부수적(附隨的) 내용을 담게 된다. 또  당의 비상상황 발생에 대비해 비상대책위원회 규정을 두고 있는 바, 새누리당과 정의당은 보칙에서 규정하고 있지만 더민주당은 부칙에 정해놓았다. 지난 1월 27일 급하게 개정한 모양새니 더민주당의 비대위에 관한 내용들은 실체 규정과 상충되는 부분이 있고, 세심하지 못하다.   

더민주당의 개정 당헌 부칙 제15호를 보면,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최고위원회의 권한을 행사하도록 했고, 비대위원장은 ‘당헌 제24조(당대표의 지위와 권한)에 의한 당대표의 직무를 대행한다(제3조 제2항)’는 규정을 두고 있다. 통상적으로 직무(職務)는 ‘맡은 사무’를 의미하고, 대행(代行)은 ‘남을 대신해 행하는 것’이다. 더민주당은 당대표와 최고위원이 공석인 상태이니 비대위원장이 당대표의 직무를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표로서 지위를 갖고 권한을 수행하는 것임에도 전례의 사례를 답습했으니 적어도 이 두 가지 점에서는 결격을 보이고 있다. 

“정당은 현대정치의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라 그것은 민주정치의 중심에 위치해 결정적이고 창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라 주장했던 미국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1892∼1971)의 말마따나 정당이 민주정치의 중심에 서서 민의를 위한 역할에 충실하려면 안정적이고 무결점 당헌에 의해 처리돼야 한다. 얼렁뚱땅 짜깁기식 당헌으로서는 정당이 발전될 수 없을 터에, 새누리당도 공천을 둘러싼 ‘샅바싸움’으로 비대위 이야기가 거론되는 바 당리당략에 따라 비대위가 횡행하는 정당사(政黨史)는 민주정치에도 걸맞지 않을 뿐더러 우리 정치의 불행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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