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 칼럼니스트

 
고대 중국의 군사들이 상급자를 만났을 때는 어떤 행동과 구호를 외쳤을까. 기록을 보면 말에서 내려 땅에 부복하거나 엎드리는 것으로 복종의 예를 표했다. 장군이나 관찰사에게는 합하(閤下), 각하(閣下)라는 칭호를 썼다. 왕의 면전에서는 ‘전하(殿下) 천세 천세 천천세(千歲 千歲 千千歲)’를 외치고, 황제에게는 ‘폐하((陛下) 만세 만세 만만세 萬歲 萬歲 萬萬歲)’라고 목청을 돋웠다.

고대 우리 군사들도 지체 높은 자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 땅에 머리를 대는 것으로 복종을 표시했다. 호칭도 고대 중국에서 하던 예를 그대로 취했다. 왕 앞에서는 ‘천천세’, 황제에게는 ‘만만세’를 외쳤다.

신라는 당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던 진흥왕~선덕여왕시기에는 ‘황제’라고 호칭했다. 그리고 후삼국 태봉을 개국한 궁예도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고려 초 태조 왕건을 비롯하여 광종도 황제로 자처한다. 광종 만년(975AD)에 세워진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에는 ‘금상황제(今上皇帝)의 만세를 기원합니다’라는 글이 있다.

조선시대는 신하들이 임금에게 삼천세를 외쳐댔다. 그리고 왕족들에게도 동일하게 썼다. 정조는 즉위 19년(1795AD) 부친의 능인 수원행궁에 행차할 당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왕은 어머니 앞에 부복하고 ‘천세 천세 천천세’라고 외친다. 실록에 당시 내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잔치는 오전에 봉수당에서 시작됐다. 주인공 혜경궁의 자리에는 연꽃무늬 방석이 깔렸고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병풍이 둘러쳐졌다. 정조는 어머니의 동쪽 자리에 앉았다. 음악과 함께 잔치가 시작되자 정조는 어머니께 술잔을 올리며 세 번을 절한 후에 천세, 천세, 천천세를 외쳤다.(하략)…’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1897AD) 이후 황제국의 격식에 따라 ‘만세’를 구호로 썼다. 고종은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고 원구단을 만들어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다. 이 자리에서 신하들은 소리 높여 만세삼창을 불러댔다. 이것이 지금까지 쓰여 지고 있는 ‘대한민국 만세’의 시초다.

군사들이 충(忠)이 들어간 구호를 쓴 것은 언제 부터일까. 전국시대 영웅 손견이 군사들의 용맹을 부추기 위해 ‘충의(忠義)’라는 깃발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병법가(兵法家)로 이름을 날린 손무(孫武)의 후손이라고 하며 17세 때부터 무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손견은 오군(吳郡)의 사마(司馬)로서 1000여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허창(許昌)의 반란을 토벌했다. 손견의 군사들은 마상의 깃발아래 도열하여 우렁찬 목소리로 ‘쫑이!(忠義)’를 외치지 않았을까.

유가에서 ‘충’은 ‘중(中)과 심(心)이 합쳐진 것으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효경은 ‘효로써 임금을 섬기면 곧 충(忠)이 되는 것이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윗사람을 섬기면 곧 순(順)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충성’은 바로 ‘흔들리지 않는 성심(誠心)’을 지칭하는 것으로 올 곧은 선비(士)의 덕목으로 회자된 것이다.

최근 육군사관학교 거수경례 구호를 ‘충성’에서 ‘통일’로 변경하자는 내부 의견이 많다고 한다. 충성이 민주적인 군대의 구호로는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은 우리 민족의 여망이긴 하지만 북한군을 자극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미2사단은 경례 구호는 ‘세컨드 투 넌(Second To None.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이다. 미군 레인져 부대의 경례 구호는 “우리는 밤을 지배 한다"라고 한다. 굳이 오래 써왔던 ‘충성’을 바꾼다면 군의 사기에 도움이 되는 멋진 뜻이 담긴 구호를 만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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