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 시인

 
어느 정치 서적에서 ‘정치는 정직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걸 보면서 얼핏 떠오른 생각은 우리 사회에 과연 정직한 정치가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정직(正直)하다는 것은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고 곧다’는 뜻인 바, 그렇다면 정치인들이 거짓이나 꾸밈없이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위민(爲民)’ 사상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 차 있고, 그 내심이 그대로 정치현장에서 행동으로 옮겨져야 함인데 필자 소견으로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오후에 헬스장을 나오다보니 종편 방송에서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해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은 김종인(77) 위원장 이야기가 나왔다. 새누리당 행복위원장을 맡았다가 물러난 뒤 다시 야당 당직을 맡아 정가의 파란이 일어난 가운데, 김 위원장은 입당 일성에서도 “정치는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신념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정직’이라! 굳이 그 단어를 따져본다면 ‘진실하다’ ‘진정심이 있다’와 유사어이고, ‘교활하다’거나 ‘부정직하다’가 반대어인 그 말에서 이 당 저 당을 기웃거린 김 위원장의 행동, 여당에 미운털이 박힌 내력들이 또 다시 들춰지고 있다.

김 위원장은 1987년, 제5공화국헌법 개헌 당시 경제민주화 조항을 입안한 주역이기도 한데, 그 이후로 쭉 ‘경제민주화 전도사’를 자처해온 인물이다. 2011년에는 안철수 의원의 경제멘토로 있다가 18대 대선 과정에서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편에 서서 경제민주화 공약을 만들어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정책이 중도개혁 계층의 표심을 얻어내게 되면서 대선 승리의 일등공신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 공적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빛을 보지 못했고, 경제민주화 정책이 뒤로 밀리자 이를 구실삼아 박 대통령과 결별했던 것이다.

그의 이력에서 나타나듯이 김종인 위원장이 안철수 의원에서 박 대통령으로 터를 바꾸고, 또 더불어민주당으로 정치적 둥지를 옮긴 전력들은 그의 능력과 함께 개성, 정치적 신념이 강한 탓도 없지는 않다. 그런 그가 책사(策士)로서 인정받을 만도 하겠으나 새누리당 일각에서는 트집 잡기다. 즉 “책사가 국가와 국민, 정의를 위해 싸울 때 책사이지, 자기 부귀영화를 위해 싸울 때는 모사꾼, 모리꾼이 된다”는 딱지를 붙이면서 갈 지(之)자 행보를 지적하고 있는데, 정권을 거머쥐도록 하는 게 책사가 정작 할 일이라면 필자에게 딱히 떠오르는 드라마가 있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중드(중국드라마)’다. 지난해 9월 한 달 동안 중국 베이징TV와 상하이 둥팡(東方) TV에서 동시 방영돼 최고의 인기를 얻었던 ‘랑야방(瑯琊榜: 권력의 기록)’은, 정초에 보도된 광저우르바오(廣州日報)에 따르면 방영 당시 한창 때는 일일 온라인 조회 수가 약 3억 3000만건을 기록했다고 하니 얼마만큼 인기작이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황위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남자들의 우정과 집념을 그린 정치 사극 ‘랑야방’ 드라마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라 하겠는데, 국내에서도 방영됐고 현재 중화TV에서 앙코르 방영 중에 있다.

이 드라마는 중국 양나라 시대, 7만의 적염군과 아버지를 잃은 장군 ‘임수’가 킹메이커 ‘매장소’로 변신해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세력이 전혀 없는 7황자 정왕(靖王)을 황제에 등극시키며 복수해나가는 줄거리로 중국 동명 인기 소설 ‘권력의 기록’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다. 필자는 지난해 말에 54편 전회를 흥미진진하게 보고서 튼튼한 구성과 박진감 넘치는 내용에 매료됐는 바, 올 1월 4일부터 재방영되고 있는 랑야방을 또 보고 있다. 중드를 자주 본 터라 전부터 질 높은 수준을 알고 있었지만 이 드라마를 통해서 엄청난 발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랑야방의 주인공은 매장소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가 역적 누명을 쓴 뒤 집안이 몰락한 가운데, 얼굴과 신분을 모두 바꾼 채 이름마저 임수에서 매장소로 바꾸고서는 천하제일의 책사로 살아간다. 당시에 양나라 도성인 금릉에서는 ‘그를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소문까지 나돌았을 만큼 매장소의 책략은 빼어난 바, 끝내 태자와 5황자 예왕의 든든한 조직과 황제의 신임을 물리치게 하고, 세력이 전혀 없던 정왕을 황제에 올렸으니 훌륭한 책사임이 틀림없다.

매장소가 정왕을 도와 황권을 쟁탈하고, 복수하기에 이르지만 권력 획득으로 상대를 파멸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권력의 비호 아래 감춰진 억울한 사건 진상을 세상에 낱낱이 밝히고, 과거의 자신을 다시 찾는 것에서 멈추는 정도(正道)의 보임이다. 가장 기본 됨은 백성을 사랑하며 정의로운 7황자를 황제자리에 오르게 한 일이었던 바, 그것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온 백성의 편안을 위해서였다. 빼어난 책사의 책략으로 도성의 정치판이 바뀌었다는 것도 이 드라마가 주는 즐거움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김 위원장을 향해 빗댄 새누리당의 책사론(策士論), “국가와 국민, 정의를 위해 싸울 때 책사이지…”라는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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