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신분제도 속에 갇혀 인간의 존엄성마저 저울질당해야 했던 시절.
이해할 수 없는 차별마저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삶.

청년 장보고는 백성을 지켜줘야 할 조국이 외려 자신을 버린 야속한 존재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엄격한 신분제도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계속돼 성(姓)조차도 왕족이나 신라 6촌(村)에서 비롯된 여섯 성씨를 비롯한 일부 세족(勢族)만이 쓸 수 있었다.

장보고 역시 골품제의 차별을 피해갈 수 없었다. 남해 바닷가의 천민 출신인 그에겐 그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의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 활보라는 이름만 있을 뿐. 장보고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에 건너간 뒤 성의 필요성을 느낀 그가 궁(弓)자를 변을 삼아 장(張)이라 하고, 복(福)에서 글자의 음절 순서에 따라 보고(保皐)라는 두 글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듯 성(姓)마저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장보고는 당시 기회의 땅으로 불리던 당나라로 건너가 사나이로서의 포부를 펼쳤다. 그러던 중 조국 신라인들이 중국 해적에 의해 노예로 붙잡혀와 고통 받는 참상을 목격하게 되고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비분강개(悲憤慷慨). 그가 느꼈을 마음 속 끓어오르는 분노는 피를 나눈 한 형제가 애매한 고통과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을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도의(道義)에 근거를 두고 굽히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바르고 큰마음’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 큰 정기(精氣)’ ‘공명정대(公明正大)하여 조금도 부끄럼 없는 용기(勇氣)’를 뜻하는 말 호연지기(浩然之氣). 자신의 출세와 부귀보다 조국 신라와 민족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던 장보고가 품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의 그런 생각이 그를 바다의 왕 ‘장보고’로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글: 백은영 기자, 사진촬영/편집: 김미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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