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터넷에 “구원의 문은 무료”라는 뉴스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바티칸에서 성베드로성당의 성문(聖門, Holy Door)을 통과해 구원을 받으려면 ‘통행료’를 내라며 노략질하는 사람들이 빈번해지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구원의 문은 무료”라며 주의를 당부하면서 “조심해라, 돈을 내야 한다고 말하는 교활하고 엉큼한 자들을 주의하라”고 경고한 데서 비롯됐다.

가톨릭에서는 희년 기간 회개와 성지 방문 등의 조건을 갖추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가톨릭만의 교리 아닌 교리가 있다. 작금에 일어난 바티칸 성당의 상황은 중세 가톨릭의 부패상을 오버랩 시키고 있다. 중세 가톨릭의 부패 하면 대표적으로 당시 성베드로성당의 건축비를 빌미로 금전 제물을 바친 자에게 죄를 면한다는 뜻으로 발행한 증서인 ‘면죄부(免罪符)’ 판매를 떠올릴 수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돈으로 구원받겠다는 종말신앙의 대표적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으로 신앙 중심에서 물질 중심으로 신앙의 축이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중세교회는 면죄부 파는 권한을 누가 갖느냐에 목숨을 걸어야 했으니 자연스럽게 교회세습으로 이어졌고, 돈은 권력과 명예를 갖게 하는 절대적 가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현상은 성경중심의 신앙과 경건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으며, 자신들의 환경과 여건에 익숙한 전통과 유전을 좇게 되면서 각종 철학과 속임수 즉, 복술과 같은 미신을 양산하며 스스로 부패와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중세 종교의 부패는 급기야 종교개혁의 당위성을 가져 왔고, 개혁적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부패는 종교개혁의 외적요인에 불과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 같다. 그러면 내적요인 즉, 종교개혁의 근본적 원인은 뭘까.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자신들이 속해 있던 교회의 가르침과 예배와 제도가 성경에 근본을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다. 예를 들어 개혁을 주장한 마르틴 루터는 “다른 사람들은 생활을 공격했지만 나는 교리를 공격한다”고 말한 것이 그 증거다. 즉, 중세교회는 진리를 좇는 참된 교회가 아니었기에 개혁을 부르짖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개혁과 함께 오늘날 장로교의 교주격인 칼뱅과 같이 다른 교리를 주창하며 마녀사냥식의 살인을 일삼는 교파의 출현은 다시 수많은 교파로 나눠지는 이유가 됐고, 분쟁의 씨가 됐다.

그렇듯이 오늘날 바티칸에서 벌어진 성베드로성당의 성문이 예수를 상징하며 이를 통과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는 성서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무슨 목적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사람이 만든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 나타난 대표적인 속임수가 될 수 있으며, 교회가 아닌 ‘교활하고 엉큼한 자’를 양산해 내는 양성소가 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어찌 보면 교활하고 엉큼한 자보다 성서에도 없는 거짓교리를 만들어 낸 쪽이 더 엄중한 벌을 받을까 두렵다. ‘구원의 문은 무료’라는 말 자체는 성서적이나, ‘베드로성당의 성문을 통과해야만 구원’이라는 말은 비성서적이며 거짓말이며 속임수란 얘기다. 나아가 중세 종교개혁의 원인이 외적요인보다 내적요인에 있다는 분석에 설득력을 얻게 해주고 있다. 그릇된 구원론이 중세시대나 오늘이나 그릇된 교리를 만들어 내고, 그 그릇된 교리를 교묘히 악용해 돈을 좇게 하는 교활하고 엉큼한 자 즉, 노략질하는 자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중세교회의 부패상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며, 마치 닮은꼴을 연상하게 한다. 문명의 이기로 많은 것이 변하고 시대와 상황의 차이는 있지만 신앙만큼은 요지부동이라는 점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경서와 진리 대신 제각각 만든 주석과 사람의 계명이 종교세계를 뒤덮고 있고, 목사안수 회장선거 장로 권사 집사에 이르기까지 돈으로 직책과 직분을 얻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산사(山寺)마다 평소나 행사 때나 물건 파는 장사꾼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면, 참으로 종교가 살아있다고 하겠는가.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성서는 가르치지만, 종교를 빙자한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은 오늘도 여전히 노략질하기에 바쁘다.

종교뿐만 아니라, 오늘날 사회와 나라가 부패한 것은 우선은 정치지도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가 살아야 사회와 나라가 산다’는 말처럼, 그 이면에는 종교지도자들이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정치지도자들은 선거 때 표를 의식한 나머지 종교지도자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당선되면 맨 먼저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가고, 종교지도자들은 이 같은 원리를 악용해 정치 위에 군림하게 되니, 종교 내지 종교지도자는 돈과 권력과 명예의 상징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성(靈性)을 발휘해 사회와 나라와 인류를 선도해 가야 할 영적지도자들이 세상과 얽힌 먹이사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종교말세다.

이 같은 종교 종말을 누가 갖다 줬겠는가. 누가 갖다 준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부패의 길을 택한 것이다. ‘구원의 문’은 베드로성당의 성문도 아니요 돈과 권력과 명예도 아니다. 오직 회개하고 종교의 본질을 회복하는 회복의 역사로 나아오는 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누가 귀가 있어 이 말을 알아듣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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