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칼럼니스트

경상남도 거창읍에 국농소(國農所-국농실)라는 특이한 지명이 있다. ‘나라 국(國)’ 자는 지명으로 함부로 쓰일 수 있는 글자가 아니었다. 이 지명에는 확실하지 않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거창군사(郡史)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국농소와 정장리(正莊里)라는 두 이름의 관계를 분석해 보면 얼추 이해가 간다. 두 곳은 바로 지척에 붙어 있다. 완원군의 후손에서 갈라진 지파로 운흥정(雲興正)파가 있다. 그곳에서 장원(莊園)을 처음 운영한 것은 운흥정 가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운흥정(正)과 장(莊)원이 합쳐 정장이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이곳 일대는 임금의 친족인 왕족이 운영하는 농장(장원-莊園)이었으므로 나라 국자를 쓰서 국농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겠다.

한양에서 내려와 경상도 거창 국농소에 일가를 이주 정착시켜 후손을 퍼뜨린 장본인은 성종 임금의 8번째 아들이며 연산군과는 형제인 완원군이었다. 완원군은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에게 충고를 하다가 유배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중종반정으로 풀려났었다. 그는 그때부터 정치에는 일체 간섭을 하지 않고 첩첩산중 오지 거창에 은거하여 조용히 살았다. 지금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완원군의 후손들은 거창을 지키며 살고 있다.

한일 강제합방 이후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 의친왕 이강은 거창에 중요한 항일 의병기지를 세우기 위해 은밀히 여러 번 방문하고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의병기지를 창설하겠다는 것은 항일 전쟁을 선포한 큰 뜻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중요한 일을 의친왕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었겠고, 아버지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황실이 항일 의지 실현을 위해 선택한 행동으로 보여진다. 그럼 왜 중요한 항일 전쟁 의병기지를 거창으로 택했는가?

거창 지역의 완원군 후손들은 황실에 충성을 바칠 수 있는 항일 역량이 충분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들은 한양이나 수도권의 일부 변절한, 일본에 아부하는 황족들에 비해 충절을 지키며 조국독립을 위한 군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정에서 승지 벼슬을 지낸 정태균과 임필희, 이낭훈 등도 거창 출신으로 의병기지 창설에 적극적으로 나서 주었다. 이낭훈은 군자금 조달을 위해 은밀하게 완원군 후손들을 결속시켜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한 인물이었다.

의친왕이 한 달여 동안 거창을 오르내릴 시기에 국농소의 큰 땅 덩어리가 계속 팔려나가고 있었다. 그 돈이 이낭훈을 통해 항일 의병기지 창설자금으로 흘러갔다는 추측은 쉽게 할 수 있었다. 완원군의 지금 생존하고 있는 여러 후손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그 시기에 조부나 부친에 의해 비밀리에 논이나 밭이며 저택, 심지어 말 농장에서 기른 말까지도 쉴 사이 없이 팔려 나갔다고 했다. 주민들은 그들이 노름 같은 엉뚱한 짓을 하여 가산을 탕진하고 있다고 오해를 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 돈의 행방에 대해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전 재산을 내어 놓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만큼 거창 국농소 완원군의 후손들은 성숙한 존황심과 애국 충절 의식은 어느 고장에서나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국농소 완원군 후손들이 황실 독립전쟁에 동참한 행동은 국민들에게 자랑스럽게 존경 받아야 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상이 여태껏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거창 의병기지 창설은 대한제국 황실에서 일제에게 정면으로 도전하기 위해 구국의 횃불을 들고 행동으로 옮겼던 대표적인 유일한 사례라 할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있었다.

아쉽게도 거창 의병기지 창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안타깝다. 현재 거창의 국농소는 이름 없이 버려진 촌 동네에 가깝다. 항일 애국의 성스러운 땅 국농소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발굴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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