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과연 진화의 종착지일까? 토끼 인간 아니, 토끼 영장류(학명은 레푸스 사피엔스)가 인류에게 전하는 장엄한 선전포고는 슬프다 못해 처절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인공은 토끼다. 그렇지만 친부모는 모두 ‘인간’이다. 즉 돌연변이 토끼 인간의 얘기다. 그렇다고 놀라지 마시라. 겉은 동일한 ‘인간’이지만 사상적인 돌연변이가 수도 없이 생산되는 세상 아니던가. 하여튼 1956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토끼 영장류 수컷의 이름은 일단 차상문이 됐다.

그의 탄생은 썩 축복받지 못했다. 외딴 시골학교 교사로 일하던 차상문의 어머니는 훗날 차상문의 아버지가 된 공안경찰 차준수에게 겁탈을 당하고 차상문을 배게 된다. 폭력적인 아버지는 기어이 차상문의 어머니를 첩으로 들인 뒤 살림을 차린다.

매일 아버지에게 맞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라난 차상문은 누구보다도 평화적이고 순수하면서도 쉽게 상처받는 예민한 성격을 갖는다. 거기다가 IQ 200이라는 명석한 두뇌가 발동을 하면서 다소 기괴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하루는 똑똑한 자신에게 질투를 느껴 집단 린치를 가한 상급생 선배들에게 “시내버스를 탈 때 돈을 냈는데 나중에 차장이 안 받았다고 하면 어떻게 하죠? 전 그게 너무 불안해서요”라고 묻는다. 이 천재토끼는 아무도 생각 안하는, 아니 ‘알면서도 외면하는’ 이런 문제들을 쌓아 놓고 하루하루를 고민하며 살아간다.

후에 버클리대로 유학을 떠난 차상문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겪으며 남북관계, 민주주의, 외국인 노동자, 성 문제와 같은 난제들을 온 몸으로 체득한다. 3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최연소 종신교수직을 획득한 차상문은 산업화된 문명에 반대하는 쿠나바머와의 대화를 통해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회의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자신의 탄생을 놓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풀도 아니고 꽃도 아니고 박테리아도 아니고 촌충도 아니고 토끼목의 토끼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도 아닌, 바로 ‘그런’ 존재로 태어난 이유가 반드시 있으리라”

그러나 해답이 나오지 않으면 또 다시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럴듯한 ‘캠페인’들을 꼬집어 본다. ‘1500cc 할리 데이비슨과 두 발 자전거 중 과연 어떤 것이 이 지구를 덜 파괴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한치 앞만 보는 인간의 좁은 식견을 비웃는다. 자전거를 타면 그만큼 운동에너지가 소모되고 그 운동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선 무언가 먹어야 한다. 그럴 경우 국제 곡물시세에 영향을 미쳐 후진국 농업이 휘청거릴 수도 있고 최악엔 후진국의 정치 판도를 어지럽게 만들 수 있다.

토끼 인간은 후에 귀국한 뒤 멸종 위기에 놓인 동식물과 사멸의 길을 걷고 있는 소수 언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저항의 상징으로 정부기관에 폭발물 상자를 배달한다.

15년 만에 소설을 펴낸 소설가 김남일 씨는 버클리 대학 최연소 종신교수직을 사임하고 몬태나 깊은 숲속으로 잠적해 홀로 산업 문명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전개한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 일명 ‘유나바머’에서 소설의 싹을 얻었다고 말한다. 카진스키는 13년간 폭발물 우편을 무작위로 발송해 3명을 살해하고 23명을 부상시킨 후 1996년 동생의 신고로 FBI에 체포된 인물이다.

“유한한 화석 에너지를 터무니없이 낭비하는 인간들! 육식이든 초식이든 생명을 섭취해야만 존재가 유지되는 인간들! 자신과 이웃들의 소중한 역사와 기억을 허투루 묵살하는 인간들! 그러고도 꾸역꾸역 종의 번식을 시도하는 인간들!”

작가는 보이지도 않는 부조리에 소리친 것이 머쓱한지 마지막에 한 마디 툭 던진다.

“작가들을 위해 마련해준 창작실에서 지구 에너지를 몽땅 써버리고 말았다. 토끼 볼 면목이 없다. 어쩌랴. 내가 원래 이런 ‘인간’인 것을!”

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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