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기적(奇蹟)’을 말한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그러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그렇듯이 대부분 기적·이적·표적에 대해서는 종교적이면서 초자연적 능력으로 막연하게 생각하며, 그러면서도 특히 신비주의적 차원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크다. 그 결과 오늘날 종교 또는 신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원인이 됐으며,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탐욕과 명예와 권력과 돈을 좋아하는 기복신앙과 같은 곁길 신앙의 이유가 됐다.

‘믿음 생활’이란 말처럼, 종교와 신앙은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밑도 끝도 없는 게 아니며, 덮어놓고 믿는 것도 아닌 약속(예언)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종교가 기독교이며, 기독교의 경서가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으로 기록돼 있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다. 약속이라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한 것인데, 왜 구약과 신약이라는 두 번의 약속이 존재할까에 대한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종교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피맺힌 사연과 절규가 담겨 있다. 구약은 옛 구(舊)로 옛 약속이며 지나간 약속이며 처음 약속이다. 신약은 새 신(新)으로 새로운 약속이라는 의미다. 약속이라는 것은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약속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그런데 구약 즉, 처음에 한 첫 언약이 지켜지지 않았기에 다시 약속했으니 바로 신약 또는 새언약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하나님과 선민(選民)과의 약속이 담긴 약속의 글이니 곧 ‘언약서(言約書)’며 나아가 신의 글이니 ‘신서(神書)’다. 이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경서(성경)에 담긴 약속은 온데간데없고, 덮어놓고 또는 밑도 끝도 없는 신앙이 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선 믿어야 할 것은 뭔가. 믿어야 할 것은 말 그대로 신(神)이신 하나님이 선지 사도들의 손을 빌려 기록으로 남긴 약속 또는 예언 그 자체다. 또 그 예언을 믿는다는 증거는 때가 되어 그 예언대로 이루어져 나타난 실상을 믿는 것이 그 예언을 믿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고, 약속한 때가 되어 약속대로 이루어져 나타난 실상을 믿는 믿음이 있다는 뜻이다.

이제 분별해야 할 것은 오늘날 신앙인들은 구약이 아닌 신약시대 신앙인들로서 장차 이루어질 신약의 약속을 믿는 믿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때인지, 아니면 신약의 약속한 것이 어느덧 때가 되어 실상으로 나타난 실상의 시대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때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이천년 전 예수도 유대인들에게 “천기는 분별하면서 왜 이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한 이유도 구약대로 이루어져 나타난 실상을 보여도 믿지 않고, 구약 안에 머물러 있는 유대인들의 구태의연한 신앙을 지적했던 것이며, 예수와 유대인들이 다 같은 하나님을 믿으며 정통과 이단 논쟁을 벌이며 싸워야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오늘날 신앙인들도 이 사실을 분별하지 못하면 그 때와 같이 신약이 이루어져도 서기관과 바리새인같이 유대인같이 신약의 약속대로 나타난 약속의 목자와 실체들을 믿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고 죽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생각할 것이다. 지나간 성경의 역사를 교훈 삼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 때라고 하는 오늘날이 아담 때 같고, 노아 때 같고, 롯 때 같고, 예수 초림 때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천년 전 초림으로 온 예수는 오병이어의 기적 등 수많은 기적과 표적과 이적을 유대인들에게 보였다. 물론 초자연적인 신의 능력을 보인 것이다. 이를 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기보다는 오히려 시험하기 위해 또 다시 표적 보여주기를 청했다. 그 때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보여 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가 보여주겠다는 요나의 표적은 과연 뭘까. 그것은 그들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기적이요 표적이었다. 바로 하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미리 말씀해 놓으신 약속 즉, 구약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대로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 실상으로 나타내 보였으니 곧 계시(啓示)가 바로 기적이며 표적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니 곧 기적이며, 이는 씨를 뿌렸으니 추수 때가 되어 뿌린 대로 거두는 ‘예언과 성취’며, 이것이 곧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최고의 진리(眞理)’며 진리의 역사인 것이다.

당시 제자들마저도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할 때, 예수는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까지 했다. ‘행하는 그 일’이란 역시 약속을 이루는 일이었다. 신약의 예언 속에서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예언이 이루질 것만을 바라보는 신앙의 때인지, 신약의 약속이 약속한 지 이천년이 지나 약속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실상의 때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오늘날 약속이 때가 되어 실상으로 응하고 있다면 오늘날도 이천년 전과 같은 기적과 표적과 이적의 역사가 이 땅은 물론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마지막 역사는 땅 끝까지 씨가 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 즉, 이루어지는 기적의 역사를 보고 믿어야 할 것이다. 시대의 기적과 표적과 이적을 지금도 보여주고 들려주고 있으니, 그날에 단 한 사람도 듣지 못했다 핑계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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