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 칼럼니스트

 
여성 인권이 우리보다 앞선다는 미국에서도 아직 여자 대통령은 나오지 않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에 대한 야망을 키우고 있다. 만약 힐러리가 대통령이 된다면 미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자 부부가 모두 대통령에 오르는 첫 사례가 될 것이다.

힐러리가 자신의 이상적인 모델로 삼고 있는 인물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내 엘러너 루스벨트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32대 대통령을 역임한 미국 최초의 4선 대통령이다. 엘러너 루스벨트는 미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여성 중 한 명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욕 하이드파크에서 제임스 델러노 루스벨트의 외아들로 태어나 평화롭고 기품 있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하버드대학 시절, 친척이었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영향을 받아 정치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1930년대 뉴딜 정책으로 대공황을 타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2차 대전 때는 연합국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정치가라는 비난도 받았지만 미국 경제를 부흥하고 세계평화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더 크다.

그가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아내 엘러너의 헌신적인 내조 덕분이었다. 엘러너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카로, 프랭클린과 먼 친척 사이였다. 여섯 살 때 어머니를 디프테리아로 잃은 데 이어 2년 후에는 아버지마저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나보내야 했다. 하지만 타고난 성품 덕분이었는지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먼저 보살피는 따뜻하고 건강한 여성으로 성장했다.

그녀는 스물한 살에 결혼을 하고 다섯 아이를 낳아 키웠다. 남편이 소외 지역과 소수민족에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했다. 농민들의 지지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남편은 해군 차관보와 상원의원 등으로 착실하게 단계를 밟아나갔다. 부부 사이도 원만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듯 보였다. 그러던 중 남편이 비서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알고는, 무늬만 부부인 관계로 살아간다.

건조하고도 불편한 부부관계가 3년 동안이나 계속되던 어느 날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남편이 척수성 소아마비로 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와 쉬라고 했다. 하지만 엘러너는 반대였다. 그녀는 남편의 재기를 돕기로 했다. 남편의 불륜은 가슴에 묻었다. 휠체어를 타는 남편의 곁을 지키며 그의 다리가 되고 정치적 동반자가 됐다. 남편을 4선 대통령으로 만들고 자신은 약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KKK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흑인 인권운동에 앞장서고, 유엔 인권위원회 의장으로서 세계인권선언을 기초했다.

고(故) 김영삼 대통령이 생전 “우리 맹순이”이라고 불렀다는 손명순 여사의 내조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가난과 친하게 지낼 줄 알아야 하고, 남편에게 용기를 줄 줄 알아야 하고, 손님을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손 여사의 신념이라고 한다. 거산(巨山)이 진정한 거산일 수 있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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