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 칼럼니스트

 
어느 한국인 디자이너가 뉴욕에 가방 회사를 열고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 지점을 만들었다. 그런데 나라마다 손님들의 관심과 반응이 달랐다. 파리에서는 제품의 디자인 자체에 흥미를 보였다. 한국에서는 달랐다. 디자이너가 어느 대학을 나왔으며, 몇 살이나 먹었으며, 사는 곳은 어디이며, 심지어 남편은 뭐하는 사람인지까지 궁금해 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출세한 남편을 두지 않으면 그 제품도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잘 입은 거지는 굶어 죽지 않는다고 했다. 얻어먹는 처지여도 이왕이면 남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긍정적인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겉만 보고서는 사람 속을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럴듯한 옷차림에 화려한 언변, 미끈한 자동차에 속아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경제를 살려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주었다가 ‘삽질’ 하는 꼴만 보기도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온전한 제 모습을 감추고 산다. 우리 모두에게는 여러 역할들이 주어지고 그에 따라 각기 다른 태도나 모습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를 속이기 위한 악의적인 가식은 문제가 있다. 가면만 보고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으려는 의도적인 외면도 문제다. 학벌과 집안, 출신지 등만 보고 사람을 차별하거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고대 그리스에서 배우들이 썼던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한다. 요즘은 배우가 맡은 캐릭터나 일반인들이 평소 개발한 각자 고유의 자아상(自我像)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의도적으로 페르소나를 만들기도 하지만, 환경에 따라 페르소나가 형성되기도 한다.

1971년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필립 짐바르도 교수가 ‘스탠포드 감옥 실험’이란 걸 했다. 대학생들을 가상의 감옥에 넣고, 한 무리는 죄수로, 다른 무리는 간수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학생들은 그것이 실제 상황이 아니라고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험이 시작되자 의외의 상황이 발생했다. 간수 역할의 학생들이 죄수 역할의 학생들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고, 죄수 역할의 학생들은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울부짖고, 살려 달라며 비명을 질러댔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별 볼일 없는 사람도 자리에 앉으면 행세를 하는 것이다. 재벌가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리 멍청해도 재벌가의 주인이 되고, 제 아무리 똑똑해도 배경이 든든하지 않으면 그 밑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멀쩡하던 사람이 국회에만 가면 이상한 소리를 하고, 귀를 막고 눈을 가린 채, 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호통을 쳐대는 꼴도 다 그런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의 본성인지, 페르소나인지, 아무튼 꼴불견이다.

요즘 얼굴을 가리고 노래를 불러 실력을 판정 받는 TV 프로그램이 인기다. 가면을 쓴 채 노래를 부르는 동안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가면이 벗겨지고 얼굴이 드러나면, 예상치 못한 노래 실력이라며 감탄하거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페르소나에 감춰진 진짜 모습을 보지 못했다며 미안해하기도 한다.

우리 주위에도, 보석 같은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회를 얻지 못하는 수많은 ‘복면가왕’들이 있다. 복면 뒤에 감춰진 진짜 모습을 들여다보려는 용기가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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