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光復)’. 아이·청년·여성·노인 등 모든 이가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웠다. 조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외국인도 평화의 일에 동참했다. ‘광복’은 어느 한 개인의 것도, 한 단체의 것도 아니었다. 모두의 바람이자 소망이었다. 이 같은 독립운동의 정신을 본받고 오늘날 우리의 과제인 ‘통일’을 이루기 위한 길을 찾아보도록 하자.

▲ 여학생들의 만세 시위 행진 (사진출처: 대판조일신문)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 삼삼오오 모여든 4000여명의 마음엔 뜨거운 게 불타올랐다. 바로 ‘희망’이었다. 나라를 잃은 국민은 누구보다 광복(光復)을 원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대한독립 만세.” 태극기를 손에 든 사람들도 한 목소리를 냈다. 어느 한 계층만이 아니었다. 아이·청년·여성·노인 등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일제에 맞서 싸워 ‘광복’을 이뤄낸 숨은 주역이었다.

◆전국적으로 퍼지는 만세운동

3.1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경성을 비롯해 북부 지방의 주요 도시인 평양·원산·의주 등지에서 전개됐다. 뜨거운 열기는 철도와 간선도로를 따라 인근 도시와 농촌에 빠르게 전파됐다. 도시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이는 학생들이었다.

만세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노동자와 농민까지 참여했다. 만세시위는 해외까지 퍼졌다. 중국의 만주와 상하이, 소비에트 러시아의 연해주와 시베리아, 미주지역 등 조선인 이주민이 있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만세 시위가 이뤄졌다. 1919년에만 약 200만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시위가 커질수록 일제의 탄압도 심해졌다. 그 과정에서 4만 6000여명이 검거됐고, 2만 3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3일 역사문제연구소의 ‘3.1운동 당시 투옥자의 직업별 분포도(전체 8511명)’ 자료에 따르면 농민(일부 지주 포함)이 58.4%(4969명)로 가장 많았다. 지식인·청년·학생 20.8%(1776명), 상공업자 13.8%(1174명), 노동자 3.9%(328명), 무직자 3.1%(264명) 등이 뒤를 이었다. 이는 3.1운동이 이념과 계급 차이를 초월해 전개된 전 민족적 항일운동이었던 것을 확인시켜 준다.

◆전 연령층, 서대문형무소 수감

일제의 탄압에도 독립운동은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 안창호 선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감옥에 수감됐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서대문형무소’다. 이곳에 투옥된 사람들은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기를 바랐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장이 수형기록카드 6259장을 분석해 작성한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연구’ 자료에 따르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는 15세 학생부터 72세의 노인까지 모든 연령대가 갇혀 있었다. 같은 지역 주민이나 한 가족이 수감된 경우도 있었다.

▲ (자료출처: 역사문제연구소) ⓒ천지일보(뉴스천지)

논문에 따르면 나이가 파악된 4377명의 수감자 중 가장 많은 연령대는 20대(57.50%, 2517명)였다. 30대(19.87%, 870명), 10대(10.56%, 462명), 40대(7.59%, 332명), 50대(3.47%, 152명) 등이 다음 순이었다. 60대(0.96%, 42명), 70대(0.05%, 2명) 등도 있었다.

카드에 죄명이 확인되는 4630명 중 87.7%(4062명)는 치안유지법·보안법·출판법 등을 위반한 ‘사상범’이었다. 사상범 중에서도 독립운동에 광범위하게 적용됐던 치안유지법 위반자가 2745명(67.5%)으로 가장 많았다. 보안법 위반 1171명(28.8%), 소요 75명(1.8%) 등이 뒤를 이었다. 일제는 주요 사상범에게는 노역을 시키지 않고 온종일 감옥에서 침묵하게 하는 고문도 자행했다.

여인철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은 “당시 일제의 식민통치가 워낙 가혹했고, 국민의 인권이나 자유권 보장이 전혀 안 되는 상황이었다”며 “일본의 속국이 된 상황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불의에 대한 저항이었고 식민지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던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남은 과제… ‘광복’ 이어 ‘평화·통일’로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과거의 일을 교훈 삼아 진정한 광복을 이뤄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는 올해가 광복 70년이자 분단 70년의 해이기에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크다.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되찾은 뜻깊은 해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통일’과 ‘평화’라는 과제가 남은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단체만 노력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모든 국민이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정용욱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은 “독립운동은 좌우가 없이 다 같이 노력했다”며 “하지만 해방 이후 나라는 완전한 독립이 아닌 분단되고 말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건 우리의 남은 과제”라고 말했다. 그는 “통일은 어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전했다.

여 운영위원장은 “해방 이후 애국정신은 오히려 후퇴했다”며 “통일에 대한 열망이 있음에도, 정권이 계속 바뀌면서 국민은 움츠러들었고 통일에 대한 올바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은 현재 상황을 인정하고 통일이라는 남은 과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중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