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光復)’. 아이·청년·여성·노인 등 모든 이가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웠다. 조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외국인도 평화의 일에 동참했다. ‘광복’은 어느 한 개인의 것도, 한 단체의 것도 아니었다. 모두의 바람이자 소망이었다. 이 같은 독립운동의 정신을 본받고 오늘날 우리의 과제인 ‘통일’을 이루기 위한 길을 찾아보도록 하자.

▲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프랭크 W 스코필드의 묘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김예슬 기자]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많은 이들의 눈물과 땀이 있었다. 여기엔 음으로 양으로 우리나라를 도왔던 외국인들도 빼놓을 수 없다. 국내에서 자행된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심지어 한국땅에 묻히기 원했다. 그 바람대로 한국에 묻힌 이들의 묘를 찾아가 보았다.

◆‘민족대표 34인’ 프랭크 스코필드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세요.’ (프랭크 W 스코필드 유언)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앞두고 찾아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들어서자 한국 이름들 사이로 낯선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비석에는 ‘애국지사 프랭크 W 스코필드의 묘’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 밑엔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도 새겨져 있었다.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영국계 캐나다인이다.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하기 위해 한국땅에 발을 처음 내딛었다.

그런 그가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그 이유는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릴 만큼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박사는 사진과 증언으로 일본의 만행을 해외에 알려 국제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데 노력했다. 또 역으로 독립운동에 도움이 될 만한 해외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1919년엔 3월 1일 만세시위 현장과 일본인의 탄압을 사진으로 찍어 해외에 알렸다. 그해 4월엔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잿더미가 된 현장을 몰래 촬영하고 조사해 보고서를 작성, 세계에 폭로했다. 박사는 한국을 사랑했다. 이는 박사가 직접 만든 한국식 이름인 ‘석호필(石虎弼)’이 증명해준다. ‘石’은 그의 종교적 굳은 의지를, ‘虎’는 호랑이를, ‘弼’은 돕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즉 석호필엔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일본의 압력으로 캐나다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는 해방 후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다시 와 서울대 교수로 재직, 1970년 4월 12일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헐버트 박사의 묘 ⓒ천지일보(뉴스천지)

◆‘한국의 은인’ 헐버트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한국의 은인.’

이 같은 명칭이 따라붙는 이는 헐버트 박사다. 11월 초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로 들어서자 멀지 않은 곳에 헐버트 박사의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다소 썰렁했던 국립서울현충원과는 다르게 이곳엔 평일임에도 해설사와 방문객들이 눈에 띄었다.

헐버트 박사가 처음 한국을 방문한 것은 교육인으로서다. 이후 5년 만에 선교사로 한국에 다시 들어온 그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고종 황제의 최측근 보필 역할과 자문 역할을 하면서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했다. 1907년엔 고종에게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를 소개하고 밀사를 파견케 했다. 또 자신도 헤이그로 가서 유럽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일제에 의해 고종이 강제로 퇴위 당했을 땐 비자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관리해 달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움직이기도 했다. 또 그는 강연과 기고를 통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 또한 한국을 사랑하기에 가능했다.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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