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경(祕境)을 맛보았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탄성을 자아낼 만한 절경을 눈앞에 두고도 섣불리 감탄하기보다는 문득 이런 고민에 빠진다. 우리를 흠뻑 적시는 감동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기암절벽과 어우러지며 오색빛깔이 화려하게 물든 산일런가. 어두움을 밝히며 떠오르는 태양이 금빛 찬란한 수를 놓은 듯한 바닷물결일런가. 이번 탐방은 ‘탐방의 의미와 그 감동’에 대해 곱씹어 보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전남 고흥(高興)… ‘높을 고(高)’에 ‘일 흥(興)’. ‘최고의 흥, 최고의 즐거움’을 뜻할까. 고흥군은 ‘High 고흥, Happy 고흥’이란 군정구호를 내걸고 있다. 고흥의 숱한 역사의 흔적과 그 세월을 함께한 빼어난 산수(山水)는 고흥을 찾는 이들에게 참으로 많은 깨달음과 이야기를 선사한다. 그러니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흥이 절로 날 수밖에… 참으로 고흥은 ‘고흥’이다.
 
▲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에 위치한 녹동항 ⓒ천지일보(뉴스천지)

전라남도 동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고흥군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지형으로, 전체 형상은 북부 남양면의 지협을 정점으로 동-서간의 폭이 좁아지다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반도의 폭이 점차 넓어지면서 마치 오리발과 같은 모양을 이룬다. 소백산맥의 한 지맥이 벌교(筏橋)부근에서 계속 남하해 침강함으로써 형성된 고흥반도는 가장 좁은 부분의 폭이 불과 3㎞밖에 되지 않는 좁고 낮은 지협에 의해 육지와 연결된다. 동쪽에는 순천만을 사이에 두고 여수반도와 서쪽으로는 보성만을 사이에 두고 보성군·장흥군·완도군과 이웃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바다에 직면해 있다.

고흥은 유인도와 무인도 등 150여 개에 이르는 수많은 섬을 포함하고 있다. 고흥의 기후는 대륙성과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함께 받아 비교적 온난한 편이다. 여름에는 많은 양의 비가 내리고 습해 곡물·쌀·보리·밀 등 주곡을 생산하기에 알맞으며, 겨울은 비교적 온난해 시설 원예 등의 농업을 하기에 적합하다. 산지는 저산성 구릉지형으로 팔영산(八靈山)이 608m로 가장 높고, 천등산 550m, 비봉산 447.6m, 마복산 538.5m 등으로 대부분의 산이 600m를 넘지 않는다.

지난 2011년 1월 10일 고흥 점안면에 위치한 팔영산지구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편입·승격되면서 더욱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곳 고흥 땅에 닿았다. 고흥이 품고 있는 다도해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은 출발 전부터 설레게 만든다.

늦은 오후 서울을 출발해 꼬박 6시간 이상을 달려 고흥에 도착한 일행은 숙소에 짐을 풀고 다음 날 일정을 점검했다. 오는 동안 어둠이 짙게 깔린 터라 고흥의 첫인상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 소록도 중앙공원의 조경.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옥빛 푸른 바다 위 어린 사슴을 닮은 섬 ‘소록도’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섬의 모양새가 어린 사슴을 꼭 닮았다. 그래서 붙여진 섬의 이름은 ‘소록도(小鹿島)’. 2009년 3월 2일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완전히 개통되면서 섬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기 시작했으며, 소록도 주민들도 내륙과의 왕래가 수월해졌다.

현재 소록도는 섬 전체가 국립소록도병원으로 지정돼 있으며, 한센병 환자와 가족들, 병원 직원과 자원봉사자 등 9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녹동항에서 소록도까지의 거리는 약 500m로 소록대교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옥빛 푸른 바다를 사이에 두고 배를 타고 왕래했다.

아름답지만 슬프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섬. 많은 이들이 소록도는 알고 있지만 과연 그곳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소록도에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중앙공원’이 있다. 잘 정리되고 가꿔진 조경들과 곳곳에 세워진 공덕비 등 여러 모양의 조형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공원이 형성됐다. 푸르른 잔디 위와 나뭇가지 사이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의 모습은 그저 평온해 보이기만 한다.
 
▲ 소록도 중앙공원 내 구라탑(救癩塔). 천사장 미카엘이 한센균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탑 아래쪽에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하지만 공원의 아름다운 경치만 감상하는 것으로 끝나선 절대 안 된다. 그것은 자칫 소록도에 얽힌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수박 겉핥기’식 관광행위에 불과할 수 있다. 그래서 소록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한센병자료관을 둘러보길 권한다. 그리고는 발길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검시실과 감금실로 옮겨 보면 어떨까 한다. 소록도는 과거 많은 한센인들의 피와 땀방울이 뿌려져 있는 곳으로, 그들의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피로 얼룩져 있는 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절대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침략과 강탈 행위는 한반도 그 어떤 곳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일본의 식민지배 초기 조선에는 광주·부산·대구 등 세 곳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사립 한센병요양원이 있었으나 수용 규모가 너무 적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대부분의 한센병 환자들은 치료 받을 기회조차 없이 여기저기서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한센병 환자들이 국가 위상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 환자들을 한 장소에 격리 수용할 계획을 세우고 1916년 2월 24일 소록도를 선정해 ‘소록도자혜의원’을 설립했다. 그리고는 전국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끌어다 소록도로 몰아넣었다. 소록도자혜의원은 초기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를 목적으로 건립됐으나, 일제 당시 그 안에서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인권유린과 학대·감금·강제노역 등 온갖 탄압이 가해졌다. 중앙공원 역시 한센병 환자들을 동원한 강제노역에 의해 공사가 이뤄졌다.

공원 입구쪽에는 검시실과 감금실이 있다. 검시실은 사망한 한센병 환자를 검시하는 해부실로 사용됐다. 현재 건물 안 내부에는 당시 검시대로 사용했던 차가운 흰 돌테이블이 중앙에 놓여 있고, 벽쪽으로는 수납장이 그대로 세워져 있다. 사망한 모든 환자들은 자신과 가족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곳에 눕힌 채 꼼짝없이 해부당해야 했다. 그리고는 화장 후 납골당에 유골로 안치됐다.

이러한 일로 소록도 환자들은 ‘3번 죽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첫 번째는 한센병을 얻은 것이요, 두 번째는 죽은 후 해부당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장례 후 화장당하는 것이다. 그들의 처절했던 상황을 표현한 일화가 가슴을 찢는다.
 
▲ 감금실(등록문화재 제67호)의 쇠창살 창문. 창살 사이로 부는 서늘한 바람이 당시 한센인들에게는 살을 파고 드는 고통이었으리라. ⓒ천지일보(뉴스천지)

감금실은 1935년 제정된 조선나예방령 규정에 의해 설치됐으며, 일제강점기 인권탄압의 상징물이 되었다. 육중한 담과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감금실에 들어서니, 싸늘한 바람이 몸을 뚫고 지나간다. 이 차갑디 차가운 감금실… 보살핌과 치료가 절실했던 환자들이 이곳에 감금돼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에 목이 메이고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소록도에 수용된 환자들은 일본인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변론의 기회조차 없이 이곳에서 감금·감식·금식·체벌 등의 징벌을 받아야 했다. 부당한 요양소 운영에 대한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일제의 조치로 이곳에서 많은 환자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거나 불구가 됐으며, 출감 시에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모두 정관절제를 당했다.

형무소 같은 감금실 안으로 작은 철장 창문이 보인다. 철장 사이로 하늘이 올려다 보인다.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자유의 문이었으리라. 숨통 같은 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족을 그리워하고, 자유를 갈망하고, 치유를 희망했을 것이다.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동산
고향 그리워 필-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청산
어릴 때 그리워 필-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필-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필-리리
-한하운 시인(한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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