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위원 시인

 
세상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일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회생활에서 경계는 과거와 현재, 동서양이 따로 없이 같은 양상을 보이는데, 근본은 타인에 대한 경계심보다는 개개인 자신의 갖춤이 확실해야 한다.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란 말처럼 먼저 나를 알아야 남과 비교해 자신이 처신해야 할 바를 알고, 닥쳐오는 상황에 대해 주의해야 함이니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것이다. 또한 옛사람의 경계(警戒)했던 어떤 일들이나 일화도 개개인이 삶을 살아가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바 당나라 시인 유종원(柳宗元)이 지은 삼계(三戒)가 그중의 하나다.

자가 자후(子厚)인 유종원(773∼819)은 중국 당나라 때 시인이자 관리자, 철학가이다. 그는 20세에 진사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며, 순종(順宗) 때에는 왕숙문(王叔文) 등을 좇아 정치개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나 당시 수구파와의 싸움에서 밀려 지방으로 좌천됐다. 유주(柳州)사마 등 지방 근무시기에 천하의 명문들을 지었으며, 4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지만 그가 남긴 600여편의 시문은 후세에 당송 8대가에 이름을 날릴 만큼 명문이기도 하다.

유자후의 삼계는 ‘임강지미’ ‘검지려’ ‘영모씨지서’에 나온다. 동물을 비유하고 있지만 결국은 자신의 근본을 모르고 날뛰는 사람들의 이야기인즉 ‘나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근본을 미루어 알지 못하고 다른 것을 빌어 제멋대로인 것을 항상 싫어하였다. 어떤 사람은 세력가에 빌붙어 자기류(類)가 아닌 것을 범하고 재주를 드러내다가 강자에게 노여움을 산다. 시기를 틈타 방자하고 난폭한 짓을 하는데 그러다가 마침내 화를 당한다. 어떤 손님이 사슴, 당나귀, 쥐라는 세 가지 동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 일과 비슷해서 三戒(삼계)를 지었다’고 한다.

먼저, 임강의 노루(臨江之糜) 이야기다. ‘임강 사람이 새끼노루를 사냥해 집으로 데려왔다. 집에 있는 개들이 새끼노루를 보고 군침을 흘렸으나 주인이 그 개들을 꾸짖어 어쩔 수 없이 침을 삼키면서도 노루와 잘 지낼 수밖에 없었다. 3년 뒤에 노루는 자신이 노루임을 망각하고 개의 한 부류라 생각해서 혼자 바깥으로 나갔는데, 길에서 놀고 있는 개들을 보고 반가워서 놀려했는데 그 개들은 노루를 죽여서 먹어버렸다. 하지만 노루는 살점이 뜯겨져 죽어가는 중에도 자신이 왜 죽임을 당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세력가와 어울리다보면 자신이 세력가인 줄 착각해 세력가처럼 굴다가 결국엔 화를 당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다.

검주의 당나귀(黔之驢)편은 이렇다. ‘검주 땅에는 당나귀가 없는데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당나귀를 들여와 쓸모없게 되자 산에 버렸다. 호랑이가 나귀의 큰 몸집에 놀라 신이라 여기고 숲에 숨어서 조심스레 살펴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당나귀가 한 번 울자 호랑이는 크게 놀라 자기를 잡아먹을까봐 무서워하면서도 자세히 살펴보니 특별한 재주가 없어 보이고 울음소리에도 익숙해져서 다가갔다. 당나귀가 화가 나 발굽으로 찼지만 호랑이에게는 별 것이 아니었다. 호랑이가 달려들어 당나귀의 목줄을 끊고 그 고기를 다 먹어치우고 가 버렸다.’ 이 이야기는 권문세가가 재주와 능력을 갖춰야 하건만 자신의 큰 덩치만 믿고 행세하다가 훗날 미천함이 들통 나면 몸집 작아도 능력 있는 자에게 잡아먹힘을 비유한 내용이다.

영모씨의 쥐(永某氏之鼠)다. ‘영주에 어떤 사람이 살았는데, 미신을 두려워하고 금기(禁忌)에 얽매임이 심했다. 자신이 태어난 해가 자년이어서 쥐를 좋아하고 고양이를 기르지 않았으며, 하인들에게 쥐를 잡지 못하게 하니 창고와 부엌이 온통 난장판이었다. 동네 쥐들이 모씨의 집에 몰려와 식량을 축내도 주인은 쥐들에 대해 화를 입히지 않았다. 낮밤으로 쥐들이 몰려다니며 물건을 갉아먹고 소란을 피워도 그 사람은 쥐를 싫어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 모씨가 이사 가고 새 주인이 왔는데도 쥐들은 전과 같이 행동했다. 주인은 대여섯 마리 고양이를 빌려와 하인들에게 쥐를 잡게 했다. 죽은 쥐가 언덕처럼 쌓이자 은밀한 데 버렸고 냄새가 몇 달이 지나고서야 그쳤다.’ 이 이야기는 자신이 남에게 해를 가하고도 화를 입지 않는 시대를 틈타서 그 시절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 생각해 마음대로 굴다가 화를 당한다는 교훈인 것이다.

하동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동시대에 살았던 당송팔대가 한유 시인이 그를 위해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을 썼고, 한 구절이다. ‘아, 아! 선비란 곤궁할 때 비로소 절개와 의리를 보여준다. 이제 평상시에는 일도 없을 때는 서로 그리워하고 즐거워하며 연회석상에 놀러 다니며 서로 사양하고, 손을 잡고 폐와 간을 꺼내 서로 보여주며 하늘의 해를 가리켜 눈물을 흘리며 생사를 걸고 서로 배반하지 않는다고 맹세하니 정녕 믿을 만하다. 그러나 일단 머리카락 한 가닥만큼 작은 이해관계가 생기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치 알지도 못하는 척한다. 함정에 빠져도 손을 뻗어 구해 주기는커녕 돌을 던지는 게 대부분이다.’ 이 내용은 진정한 우정 어린 폐간상시(肺肝相示)인 바, 하동 선생의 삼계는 오늘날 읽어봐도 세상사는 법과 함께 감명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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