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이 쓰러져간 미국 초기 이민자들 위한 진혼곡 ‘선구자’

멀지도 길지도 않은 세월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일제의 칼날에 짓밟힌 대한제국의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뼛속까지 스며든 서러움을 토하며 조선인들은 조국을 등지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낯선 미국 땅으로 건너갔다. 이 책은 헐벗고 굶주렸던 초기 미국 이민자들을 그린 역사소설이다. 동시에 해외 지원국으로서 국격을 높이고 있는 대한민국이 오랫동안 잊어왔던 우리 역사의 한 토막이기도 하다.

정처 없는 사탕수수 노동자로 때로는 탄광 노동자로, 다치고 덧난 상처가 짓무르도록 일하면서도 이민 선구자들은 아슴아슴 베어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하나만으로 고단함을 달랜 세월을 살았다. 오랫동안 마주한 야멸친 상흔은 그들의 가슴을 할퀴고 조롱했지만 묵묵히 견디며, 먹을 것과 입을 것만 빼놓고 상해임시정부에 막대한 독립자금을 보태기도 했다.

많은 초기 이민자이 그렇듯 일자무식 사탕수수 밭 노동자였던 박유진은 탄광에서 일하다가 혼자 유일하게 살아남은 뒤, 비교적 평화로운 유타 주에 둥지를 틀게 된다. 그의 부인인 순자와 장남 제이콥, 장녀 루스, 차남 다니엘, 막내 그레이스는 늘 배가 고팠으나 한가로운 농경생활에 흠뻑 취해 진한 가족애를 느끼며 살아간다.

어린 시절 고아인 자신을 구해주고 키워준 선교사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유진은 우직하고 성실한 남자였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에다 선교사 덕에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남편을 따라 바다를 건너 온 순자는 영어는 전혀 할 줄 몰랐으나 헌신적이고 지혜로운 여자였다.

유진 가족에게 몰몬교가 많이 거주하는 유타주는 더없이 평화로운 안식처였으나, 순자는 번지는 동포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내지 못한다. 주변에는 유진의 식구 외에 조선인이 살지 않았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캘리포니아에 살았으나 유진은 애써 일궈놓은 삶의 터전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와 자주 이사문제로 싸우곤 한다.

그러나 유진은 명석한 장남의 장래를 위해 결국 일류 대학이 있는 캘리포니아로 집을 옮기게 된다. 유타 주에서의 평범한 전원생활과는 달리 캘리포니아는 몹시 소란하고 분주한 도시생활을 강요한다. 그리고 새로운 동포들과 생활은 양날의 검으로 유진의 가족에게 찾아온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고 싶어 했으나 미국사회는 아시아인들을 위험요소라고 판단하고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유색인종은 서로 각각의 집단을 이루며 뭉쳐 살아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강한 민족주의가 한인사회에 스며들었고,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마련에 더없이 좋은 기반이 됐다. 막 도시생활에 적응한 순자는 남편에게 많은 돈을 조국을 위해 보내자고 조르지만 현실적인 유진은 단호하게 뿌리친다. 그러나 순자는 양보하지 않는다.

“당신도 우리도 나라를 잃었어요. 다시 고아가 되고 싶으세요? 우리가 어디에서 살든지 우리나라는 우리 영혼 속에 살아 있어요. 우리나라는 우리 생명의 일부에요. 영원히요.”

순자는 말리는 남편을 뒤로 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진한 동포애를 느낀다. 그러나 곧 깊은 슬픔이 유진의 가족을 적병처럼 에워싼다.

착하기만 했던 차남 다니엘이 동포의 오발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고, 그 후 삐꺽거리는 생의 바퀴는 끝도 없이 무거운 아픔을 동반해 이 단란한 가정을 짓밟는다.

남자친구의 아버지에게 험한 일을 당한 뒤 모멸감과 자책감으로 아무 말 없이 집을 뛰쳐나간 그레이스로 인해 쓰러진 순자는 뇌졸중을 앓게 되고, 이후엔 진주만 공습으로 유색인종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달하자 미국 정보요원이 제이콥을 체포하려는 것을 제지하다가 죽음을 맞게 된다.

평생을 자식과 조국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순자의 죽음은 이주민의 기틀을 닦다가 죽어갔던 이름 모를 초기 이민자들의 희생을 내포한다. 그리고 그 썩어져간 한 알의 밀알은 희망을 잉태한다. 순자가 세상을 떠난 뒤 상처받은 그레이스가 돌아왔다. 얼굴을 타고 홍수같이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뚫고 달려오는 막내딸을 위해 유진은 두 팔을 활짝 펴고 딸을 껴안는다.

“이제 그레이스가 돌아왔으니 나는 더 슬퍼할 일이 없다. 네 엄마가 무척 기뻐하겠다. 어서 집으로 가자. 엄마는 모든 수고를 마치고 쉬고 있단다.”

마이클 리 지음/한국학술정보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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