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US114(x50) 인천 운서동 유적 2지점 22호 주거지 기장(위, 왼쪽), GYJ 86-14(x50) 양양 지경리 유적 4호주거지 기장 모습, 인천 운서동 2지점 주거지 노출상태 (사진제공: 문화재청)
‘인천 운서동Ⅰ’ ‘양양 지경리’ 취락 유적 발굴조사
수렵 생활서 잡곡 농경으로의 생업 방식 변화 확인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최근 신석기시대 전기 대규모 취락지로 알려진 ‘인천 운서동Ⅰ유적’과 ‘양양 지경리 유적’에서 우리나라 초기 농경의 발전 양상을 밝혀줄 조(粟), 기장(黍) 등의 곡물자료가 나왔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농경생활 모습은 어떠했을까. 선사시대는 글자나 문자 등의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때다. 구석기, 중석기·신석기 그리고 청동기와 철기시대로 나뉘는데, 이번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토기 압흔(壓痕, 눌린 흔적) 조사 결과를 통해 우리나라 초기 농경생활을 엿볼 수 있게 됐다.

인천 운서동Ⅰ유적은 중부 서해안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기원전 4000~3600년)의 대규모 취락 유적으로 평가된다.

학계는 정형화된 농경구의 출현과 대규모 주거지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중국의 화북, 요서 지방에서 이뤄진 조(粟) 중심의 초기 농경이 이곳에 도입됐고, 이 초기 농경이 동해안과 남해안으로 확산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번 발굴 조사에서 재배 종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인천 운서동Ⅰ유적에서는 다량의 조, 기장 등 곡물 압흔 131점이 확인됐다. 이로써 곡물 압흔이 확인된 우리나라의 대규모 취락 유적지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 밝혀졌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인천 운서동Ⅰ유적의 조사 결과는 초기 농경에서 조, 기장 등 잡곡을 직접 재배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귀중한 실증 자료로 평가된다”며 “당시 도토리를 위주로 한 채집 또는 수렵 중심의 생활에서 조, 기장 등의 잡곡 농경이 도입돼 생업의 안정성이 향상되는 등 생업 방식이 크게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신석기시대 중기의 취락 유적인 양양 지경리 유적에서도 조, 기장 등의 잡곡과 들깨 등 압흔 294점이 조사됐다. 이는 중부 서해안에서 시작된 초기 농경이 동해안과 남해안으로 확산됐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특히 양양 지경리 유적은 다른 유적과는 달리 기장의 산출량이 조의 약 6배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돼 기장 중심의 농경이 발달했으며, 수렵·채집뿐만 아니라 농경의 비중도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구소는 “이번에 확인된 조, 기장, 들깨 압흔 대부분은 껍질에 쌓인 상태로 탈곡된 후 도정 단계에서 토기에 혼입됐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들 모두 가을작물이라는 점에서 추수 이후인 10월을 전후한 시점에 토기가 제작됐을 것으로 보인다”며 “한 개체의 토기 점토 안에 다량의 작물(70여점)을 혼입한 사례도 확인된다”고 밝혔다.

또한 “앞으로 토기 압흔 분석이 보다 활발히 진행된다면 한반도의 농경 기원과 선사 경제생활의 복원에 도움이 될 학술자료가 확보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전했다.

한편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은 이번 조사에서 정밀사진 확보를 위해 주사전자현미경(SEM) 촬영을 실시했으며, 식물에 대한 자세한 동정(同定, 생물의 분류학상 소속이나 명칭을 정함)은 관계 전문가인 오바타 히로키(일본 구마모토대학) 씨와 이경아(미국 오리건대학) 씨의 자문을 받았다.

연구 성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 신석기시대 고고식물 압흔분석보고서’로 발간해 국내외 국공립 도서관과 국외 연구기관 등 관련 기관에 배포하며, 국립문화재연구소 누리집(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에서 전자파일로 내려받을 수 있다.

▲ 토기 압흔 조사 과정 (사진제공: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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