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소설가, 문화평론가)

아침, 한 장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1986년 그러니까 24년 전, 멕시코시티 올림피코스타디움.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A조 예선 1차전에서 허정무 선수가 마라도나에게 태클을 가하는 모습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기억들이 많이 뭉개져버렸지만, 대충 이런 것들은 기억해 낼 수 있다.

지구 저편에서 전파를 타고 날아온 TV 화면 속 우리 선수들은 시작 전부터 몹시 주눅 들어 보였고, ‘없어’ 보였다.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은 우리 선수들은 낯선 땅에 내버려진, 그래서 몹시 황망한 처지에 놓인 듯 했고 상대는 먹잇감을 앞에 두고 으르릉거리는 맹수처럼 보였다.

그 때, 대학가는 최루탄에 절어 있었고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몹시 열망하고 있었다. 우리 선수들이 낯선 그 곳에서 왠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여겼던 것은(실제 그러했는지는 지금도 확신하지 못한다), 우리들 현실이 ‘어리둥절’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때 세계의 눈은 아르헨티나의 영웅 10번 마라도나에게 쏠렸고, 그러했지만, 그는 별 볼일 없었다. 다른 경기에서는 모두 득점하고 아르헨티나를 결국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유독 이 경기에서는 골맛을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골맛은 커녕 한국의 ‘쪼인트’ 맛을 단단히 경험했다. 우리들은 안다. 그 ‘쪼인트’ 맛을.

세계 최고의 축구영웅에게 ‘쪼인트’ 맛을 보여준 이가 바로 허정무 선수였다. 어느 외신은 태권도 축구라고 비아냥거렸고, 우리들은 그것이 솔직히 조금 ‘쪽 팔린다’고 했던가. 3골을 내주고 막판에 박창선 선수가 곡사포 슛으로 한 골을 넣은 다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흔들었지만, 그 마저도 ‘쪽 팔린다’고 했다. 저토록 무참하게 지면서 한 골 넣었다고 저토록 감격해 하다니! 우리들은 아마 그 때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이 사진을 들여다본다.

‘태권동자’ 허정무 선수의 저 날렵한 모습을 보라. 무하메드 알리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라고 했다. 이 세계적인 복싱 영웅도 물찬 제비처럼 날아서 거침없이 일격을 가하는 이 한국 청년의 모습을 보았다면, 아이쿠 했을 것이다.

마치 정밀타격하는 미사일처럼 ‘태권동자’의 발등이 정확하게 상대의 허벅지를 가격하고 있다. ‘악동’ 마라도나는 태권동자 마루치에게 얻어터진 파란해골 13호처럼 표정이 일그러져 있다. 통쾌하고 유쾌하다. 
사진으로 봐선 분명 반칙이지만, 허정무 선수는 “반칙이 아니었으며, 반칙이었다면 퇴장시켰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반칙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허정무 선수가 ‘태권도’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의 절박함이 있었다. 그의 진술대로, 32년 만에 본선에 진출한 우리 선수들은 경험도 부족했고 상대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 콘크리트 바닥에 씨뿌리기였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상대와 겨루기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악으로 깡으로.

그 때는 그랬다. 축구도 그렇게 했다. 그것이 축구면 어떻고 태권도면 또 어땠으랴. 그는 단지 막아내야 한다는 지고지순한 사명에 온 몸을 던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태권도 축구’는 경이롭고 아름답다. 별로 내놓을 것 없었던, 그래서 고단하고 부끄러웠던 그 시절을 이겨내게 했던 힘을, 나는 이 ‘태권도 축구’에서 발견한다.  

24년 만에 허정무와 마라도나가 월드컵 무대에서 감독으로 다시 만난다.

마라도나는 지금 몹시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원래 맞은 놈이 기억을 더 잘 하는 법이니까.  이번에도 허 감독께서 멋지게 한 번 보여 주시라. 지난 것이 로우 킥이었다면 이번에는 하이킥이다.

거침없이 하이킥, 지붕 뚫고 하이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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