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 1950~1960년대 정겹고 애환 서린 당시 학생들의 교복, 책가방을 사용했던 모습 그대로 재현한 공부방. ⓒ천지일보(뉴스천지)

지난 15일 인천의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에 들어서자 문화유산 해설가인 곽영애(부평 거주) 씨는 관람객들을 친절히 맞이하면서 수도국산의 한국전쟁 이후 어렵고 가난하게 생활했던 1950~1960년대 달동네의 생활모습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판자촌 사이 좁고 굽은 골목길 모퉁이에 자리 잡고 홀로 서 있는 희미한 가로등의 쓸쓸한 모습과 정겹고 애환 서린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재현한 이발소, 연탄판매소, 공동 화장실, 그리고 달동네 사람들의 모습을 밀랍 인형으로 재연해 당시 어려웠던 생활상을 대변하는 듯했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은 인천시 동구 송현동 163번지 근린공원에 위치한 곳으로, 지난 2005년 10월 25일 개관했다. 연면적 618평에 지하, 지상 1층의 제1종 현대생활사 전문박물관으로 1950~1970년대 달동네 서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체험중심의 교육박물관이다. ‘수도국산 달동네’는 인천 사람들에게는 정겨운 고향 같은 곳이다. 인천에서 60대 이상은 ‘수도국산’하면 ‘달동네’를 연상하게 된다.

수도국산(水道局山)은 1909년 일제강점기에 산꼭대기에 있던 수도국에서 유래됐고 옛 이름은 소나무가 많아서 송림산(松林山) 혹은 만수산이라 했다. 그러나 외병들이 동인천역 서쪽에 있는 마을 전동을 일본관사 및 주거지역으로 점거하자, 가난한 한국인은 강제 이주해서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

당시 이 주변 일대는 바다였지만 바다를 메워 매립된 땅에 방직공장, 차령공장 등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전국 각처에서 몰려들었다. 전에는 자그마한 언덕이 바닷가의 조용한 소나무 숲이었지만 소나무를 베고 언덕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달동네의 역사는 시작됐다.

소나무가 많은 송림산이 수도국산으로 산 이름이 바뀌게 된 데에는 근대 개항기 인천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인천은 본래 우물이 적을 뿐 아니라, 수질 또한 나빠서 개항 이후 증가한 인구와 선박들의 물 확보가 큰 고민이었다. 당시 일제 통감부의 강압에 의해 한국 정부는 1906년 탁지부(度支部)에 수도국(水道局)을 신설하고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에 착수했다.

‘수도국산’이란 명칭은 이곳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를 설치하면서 생겨났다. 즉 ‘수도국’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달동네는 아직도 전국의 대도시 주변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모습이지만 특히 ‘수도국산 달동네’는 달동네 중에서도 그 유래와 역사가 가장 깊은 곳이다.

한국전쟁 이후 약 5만 5천 평 규모의 산꼭대기까지 피난민들과 산업화 시기에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지방 사람들 3천여 가구가 살면서 ‘수도국산 달동네’라 부르게 됐다.

인천광역시 동구청은 ‘송현동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이미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고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는 ‘수도국산 달동네’ 사람들의 힘겹고 고달펐던 삶을 되살리고자 수도국산에 ‘달동네 박물관’을 건립하고 이곳을 문화자료 제23호로 지정했다.

역사 속에 실존했던 수도국산 달동네 서민의 평범한 삶을 박물관의 주된 테마로 삼은 점은 우리나라 박물관의 역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겠다. 이 달동네 박물관은 기성세대들에게는 향수를, 현 2세대들에게는 기성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2005년 개관한 제1종 근현대 생활사 전문 박물관인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만이 그 역사를 대변하고 그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부지런히 살아온 달동네 사람들의 미덕을 후세까지 보존해야 할 ‘이런 박물관’도 있다는 것이다.

▲ 개인 가정수도가 없어 공동으로 물 배급을 기다리는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 1950~1960년대 사용했던 단조로운 가정용품들. 가난했던 삶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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