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의해 강제로 사할린이라는 낯선 땅으로 끌려간 한인들. 그들은 해방 이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그들은 차가운 땅에 그렇게 버려진다. 1990년대 ‘영주귀국사업’이 시작되지만, 대상은 매우 제한적. 결국 이산가족 문제만 되풀이 된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지금, 여전히 한인들은 고통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재외동포에 대한 정부의 정책 의지는 미온적이다. 이에 연재기사를 통해 사할린 한인의 현 실태를 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 이 기사는 취재를 토대로 1인칭 소설형식으로 작성한 스토리텔링식 기사입니다.

▲ 사할린 한인 리환진씨가 한국으로 영주귀국하기까지 겪은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가 간직하고 있던 옛 사진은 그의 잃어버린 삶을 대신 알려줬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리환진씨의 잃어버린 삶
고난과 시련의 삶… 父 “살아서 꼭 한국 가라”
귀국했지만 “죽자고 여기 왔냐” 비꼬는 말 들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내 조국은 어디였을까. 마치 집을 잃은 길고양이 같았다. 사할린, 이르쿠츠크, 시베리아 일대, 카자흐스탄, 그리고 지난 2009년 영주 귀국한 한국. 수십 년 동안 세상을 떠돌아다녔지만, 어디 하나 마음 둘 곳 없었다.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지난 삶을 이야기한다면 책을 몇십 권 써도 모자를 정도다.

◆일제시대, 부모님 사할린 강제징역

나는 1938년 사할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는 탄광에서 일하셨다. 부모님은 일제 때 이곳으로 강제징역 됐다. 삶은 늘 고난과 시련이었다. 일이 고되 아버지는 종종 술을 드셨다. “일본 놈 때문에 이곳까지 왔어. 고향 땅도 못 밟다니….” 술 취한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시며 푸념하셨다. 그리곤 그 한을 노래로 달래셨다.

어릴 적 나는 일본학교에 다녔다. 그 영향으로 지금 내 행동과 말투는 일본인과 비슷하다. 1950년대에 북조선 잡지가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남조선보단 북조선의 김일성 소식이 더 익숙했다. 그 당시 북에서 젊은 사람들도 많이 왔다. 우리(사할린 한인)가 북조선 국적을 얻게 하기 위해서다. 그때 나도 북조선 사람이 됐다.

처음엔 몰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후회가 커졌다. 어딜 가도 맘 편히 일하지 못해서다. 소련 국적을 얻기 위해 방법을 찾아 헤맸지만 혼자 힘으론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땐 이미 한국 정부가 우릴 버린 때였다.

나에게 희망이 생긴 건 스무 살 무렵이었다. 소련 국적을 가진 첫 번째 아내를 만났기 때문. 그의 도움으로 나는 북조선 국적을 버리고 소련 국적을 얻었다.

▲ 사할린 위치가 표시된 지도 ⓒ천지일보(뉴스천지)

우리는 이르쿠츠크에서 함께 살기로 했다. 그곳에서 1년 정도 교사로 일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정착할 순 없었다. 1961년쯤 우린 시베리아 쪽으로 넘어갔다. 당시 나는 아무런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공장에서 잡일을 했다.

1977년쯤엔 카자흐스탄에 살았다. 이곳에서도 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사진공부를 했다. 이 당시 사할린 신문이 있었는데 이곳에 사진을 찍어 보냈다. 서툴지만 글도 적어 보냈다. 신문은 소련 곳곳에 전해졌다.

1991년 소련은 결국 붕괴됐다. 그 여파로 나는 일자리를 잃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살기가 힘들까.’ 고뇌에 빠진 것도 수백 번. 그래도 살아야만 했다. ‘너는 꼭 살아서 한국 땅에 들어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아서다.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며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고층아파트를 짓는 인부로 일하게 된다. 사실 돈은 못 벌었다. 그래도 일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 본적지와 본관 등이 적힌 메모지와 청년시절 모습.ⓒ천지일보(뉴스천지)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한국

“환진, 자네 소식 들었나? 한국에 들어갈 수 있대.” 우연히 고향 사람에게 들은 말. 그 순간 깊게 주름이 팬 아버지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내 얼굴에도 뜨거운 게 흘러내렸다. 참아야만 했던 한 서린 눈물이었다.

“드디어… 드디어 우리 부모님의 조국에 내가 갈 수 있다니.”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1세대(1945년 8월 15일 이전 사할린 거주 또는 출생자)들만 한국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조건 때문. 자녀들과 생이별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주택 입주조건도 무조건 2인 1가구였다. 그 당시 첫 번째 아내를 잃은 나는 새 아내를 얻어야 했다. 우린 2009년 영주 귀국한다. 그리고 충청남도 천안에 있는 버들마을에 자리 잡는다.

그토록 원했던 부모님의 땅. “잘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싸늘한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뭐 하러 (한국에) 들어 왔느냐, 죽자고 여기 왔느냐.” 가슴이 찢어지는 말들도 들었다. 그래도 참아야만 했다. 아버지의 고국이기 때문에….

▲ 영주귀국 후 만든 ‘홍주(洪州)이씨’ 족보와 어릴 적 친인척과 함께 찍은 사진 ⓒ천지일보(뉴스천지)

한국에 오면 꼭 하겠다고 마음먹은 게 있다. ‘홍주(洪州) 이씨’의 족보를 만드는 것. 그건 일제에 의해 빼앗겨야만 했던 아버지와 내 인생이었다.

그래도 단 한 번도 한국인이란 걸 잊은 적은 없다. ‘옥숙’ ‘수엽’ 두 아이에게도 한국 이름을 지어줬다. “어디를 가든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절대 잊으면 안 된다.” 늘 아이들에게 말했다.

수십 년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을 뿐인데… 나에게 남은 건 주름뿐이다. 얼마나 더 살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단지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사할린 부모님 산소에 한 번만이라도 가는 것. 하지만 환경이 여유롭진 않다. 심장도 좋지 않고, 아내도 2년 전 세상을 떠나 혼자 먼 곳을 갈 수도 없다.

한국엔 광복이 왔고, 남북 이산가족 상봉도 이뤄지고 있는데, 우리(사할린 한인)는 아직도 일제에 갇혀 사는 듯하다. 거기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우린 잊히고 있다. 그건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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