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나니 초록으로 물들었다. 온통 푸르다 못해 청량감마저 느껴지니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이제 곧 있으면 낙엽이 지고 가지에 눈이 쌓이겠지. 그리고 추운 겨울을 이기고 나면 다시 또 새싹이 나고 꽃을 피우겠구나.

그 옛날, 시와 가사로 노래를 읊었던 선비들도 산 중에 정자를 짓고 경치를 바라보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자연과 마주하니 절로 가사가 읊어지지 않았으랴.

유난히 창공이 아름다웠던 지난달 초 담양의 주요 누정(누각·정자)을 찾아 자연과 벗한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 나섰다.

 

▲ 소쇄원 중심. 담장 뒤로는 제월당, 앞으로 광풍각이 보인다. 사람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담양은 호남문학의 대표적인 지역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누정(누각·정자)을 보유하고 있다. 그만큼 누정문화가 가장 발달하고 활발했던 곳이 담양이다. 담양의 누정 대부분은 전망이 뛰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어 사계절 각각의 경치가 빼어나다.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시대 사림(士林)들은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피해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물산(物産, 생산물·토산물)으로 인심이 넉넉한 호남지방으로 나남했다. 담양에 많은 누정이 있는 것이 이와 관련이 있다.

 

 

 

▲ 광풍각 후면 담장 뒤에서 바라본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사림들은 담양에 누정을 건립하고 인재 양성은 물론 시단(詩壇)의 결성과 시회(詩會)를 통해 심금을 울리는 훌륭한 시가문학을 창작했다. 이러한 시문학의 전통은 국문시가의 하나인 ‘가사문학(歌辭文學)’을 탄생시켰다.

당대 누정은 그냥 놀고 즐기는 곳이 아니었다. 사림들은 이곳에서 사상과 철학을 설파하고, 현실 정치를 비판하며 대안을 논했다. 그래서 온돌방을 둔 정자를 짓고 사시사철을 지내며 사상이 담긴 가사문학의 꽃을 피웠다.

특히 담양의 누정문화를 접할수록 다른 집안 선비들과의 인맥이 실타래처럼 엉켜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정치·문학·사회사가 함축돼 있기도 하다.

 

 

 

 

▲ 광풍각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 좋기만 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자연과 인공 조화가 완벽한 조선 중기 대표 원림 ‘소쇄원’

전남 담양에서도 남쪽에 위치한 소쇄원은 우리나라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차로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천안논산고속도로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창평 IC를 통과해 가사문학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304호인 소쇄원은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 담겼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입구에서부터 보기만 해도 시원한 대나무숲길이 펼쳐지고, 성큼 들어서니 산수초목(山水草木)으로 푸름이 가득해 공기부터 남다르다.

 

 

 

 

▲ 소쇄원 경내의 식물 ⓒ천지일보(뉴스천지)

소쇄원은 정원 전체를 통칭하는 말이다. 원래 12채의 누각과 정자가 있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정원의 규모가 점점 축소되면서 9채가 사라지고 현재 대봉대, 광풍각, 제월당 3채만이 남아있다. 하서 김인후가 1548년에 쓴 ‘소쇄원 48영’을 통해 소쇄원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시원하게 쭉쭉 뻗은 나무들 사이로 계곡을 끼고 아름다운 정원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긴 담장이 동쪽에 걸쳐 있고, 북쪽의 산사면에서 흘러내린 물이 담장 밑을 통과해 소쇄원의 중심을 관통하니 산수초목이 어찌 어우러지지 않은 곳이라 할 수 있을까.

 

 

 

 

▲ 소쇄원 오곡문 사이로 흐르는 개천과 한쪽의 우물 ⓒ천지일보(뉴스천지)

이곳 소쇄원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매우 뛰어나다. 그래서일까. 가사 문학의 대가인 송순, 정철, 송시열 등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조선 중기 많은 문인들이 소쇄원을 자주 드나들었던 것도….

우리나라 전통 정원은 누가 만들었느냐에 따라 궁원과 향원, 민간정원으로 나눌 수 있다. 정원의 성격에 따라 별서정원, 산수정원 등으로도 분류하는데 별서정원은 선비가 낙향을 해 꾸민 정원을 의미하며, 산수정원은 자연을 감상하기 위해 만든 정자를 말한다. 보길도 윤선도의 ‘부용동’과 담양 양산보의 ‘소쇄원’ 등이 대표적인 별서정원이다.

 

 

 

 

▲ 송강정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식영정·환벽당·송강정으로 나누고 ‘정송강유적’이라 부른다

담양은 광주(전남)와 매우 인접해있다. 소쇄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창계천을 사이에 두고 ‘식영정(담양 권역)’과 ‘환벽당(광주 권역)’이 마주하고 있다.

 

 

 

 

▲ 식영정 모습. 답사팀이 찾아 갔을 때는 이곳에서 머물며 심신수련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른 이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식영정은 환벽당, 송강정과 함께 ‘정송강유적’이라고 불린다. 소쇄원, 환벽당과 함께 ‘한 동네에 있는 세 명승’이란 의미의 ‘일동지삼승(一洞之三勝)’에도 속한다. 16세기 중반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이며, 식영정 이름은 임억령이 지었는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김성원은 송강 정철의 처외재당숙이다. 정철보다 나이가 11살이 많았으나, 정철이 이곳 성산에 와 있을 때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문이다.

 

 

 

 

▲ 식영정 옆의 거목 ⓒ천지일보(뉴스천지)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김성원·고경명·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해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 이십영(息影亭 二十詠)’을 지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식영정 이십영’은 후에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됐다.

식영정 정자의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2칸이고 단층 팔작지붕이며,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한다. 정자의 가운데에 방을 배치하는 일반 정자들과 달리 한쪽 귀퉁이에 방을 두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깐 것이 특징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굴도리 5량의 헛집구조를 하고 있다.

 

 

 

 

▲ 환벽당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식영정 건너편에 있는 환벽당은 광주광역시 북구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쪽 언덕 위에 있다. 어린 시절 정철의 운명을 바꿔 놓게 한 김윤제(1501∼1572년)가 짓고 기거했던 곳이다.

‘푸르름이 고리를 두른다’는 환벽(環璧)이란 이름의 뜻 그대로 환벽당을 둘러 있는 담장 안에 온통 푸름이 가득하다.

환벽당은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와가이며, 당호는 신잠이 지었다.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고, 임억령·조자이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김윤제는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했으나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을 했다. 그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정철과 김성원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 ‘푸르름이 고리를 두른다’는 환벽(環璧)이란 뜻을 가진 환벽당 앞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전해지는 곳이다.

그 사연이라 함은 “조부의 묘가 있는 고향 담양에 내려와 살고 있던 당시 14살의 정철이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기 위해 길을 가던 도중에 환벽당 앞을 지나게 됐다. 때마침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창계천 용소에서 용 한마리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꿈에서 깬 후 용소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 정철을 데려다가 여러 문답을 하며 그의 영특함을 알게 됐다. 그는 순천에 가는 것을 만류하고 정철을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했다”는 내용이다.

 

 

 

 

▲ 송강 정철 시비 ⓒ천지일보(뉴스천지)

정철은 이곳에서 김인후, 기대승 등 명현들을 만나 학문과 시를 배웠다. 김윤제는 정철을 외손녀와 혼인하게 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환벽당은 정철의 4대손 정수환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현재 연일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2013년 11월 6일에 환벽당을 비롯한 그 일원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07호로 지정됐다.

식영정과 환벽당 그리고 송강정. 이들 정자의 사연 속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송강 정철(1536∼1593년)이다.

정철은 호가 송강으로, 1561년(명종 16) 27세에 과거 급제했다. 그 뒤로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동인과 서인의 싸움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성산에 내려와 송강정을 짓고 가사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문학작품을 지었다.

송강정은 정면 2칸,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측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정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이, 측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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