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장왕 17년 봄에 초나라는 정(鄭)나라를 침공해 3개월 동안 포위한 끝에 마침내 항복을 받아냈다. 정나라 양공은 웃통을 벗은 채 양을 끌고 나와 장왕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신하의 예를 올렸다. 그는 정나라 조종의 덕을 살피어 종묘사직에 대한 제사가 끊이지 않게 신하로 받아준다면 실로 천만다행이라고 간곡히 간했다.

신하들의 반대 의견이 거세었지만 장왕은 귀담아 듣지 않고 전군을 지휘해 30리 밖으로 물러나서 정(鄭)나라와 맹약을 맺고 정왕의 아우 자양을 볼모로 잡았다.

그해 여름 6월, 북쪽의 큰 나라인 진(晋)나라가 정(鄭)나라를 구원하자는 뜻으로 초나라에 싸움을 걸었다. 초나라 군은 황하에서 진나라 군을 맞아 모두 무찔러 버렸다. 그 기세로 초나라는 형양까지 쳐들어갔다가 천천히 초나라로 회군했다.

진(晋)나라 경공(景公) 3년은 초나라 장왕 17년이다. 그해에 초나라가 정(鄭)나라를 침공하자 정나라는 진(晋)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놓고 있었다. 그러자 진나라에서는 순임보를 중장군으로, 수화를 상장군으로, 조식을 하장군으로 임명했다. 또한 극극, 난서, 선곡, 한궐, 공삭을 각기 부장으로 삼아 정나라의 구원을 위해 떠나게 했었다.

진나라 구원군은 6월에 황하 기슭에 닿았다. 정보에 의하면 이미 초나라군은 정나라를 함락시키고 정나라를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게 하고 화의를 맺었다는 것이었다.

장군 순임보가 군대를 철수시키려고 했다. 선곡이 나서서 완강히 반대했다.

“정나라를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은 만큼 끝까지 정나라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진나라 군은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갔다.

초나라는 이미 정나라를 항복시켰고 이제는 말에게 물을 먹인다는 구실로 황하의 연안까지 올라가 북쪽을 위세로서 제압을 하고 돌아오려고 했다. 그러나 진(晋)군이 남쪽으로 내려오자 사태는 급전해 대결의 불꽃이 튀기고 말았다.

정나라 입장에서는 초나라에 굴복했으므로 서투른 수작을 부릴 수 없어서 초나라 군과 함께 진나라 군에 대항했다. 그래서 진나라 군은 무참히 격파돼 앞을 다투어 병사들이 황하를 건너 도망치려했다.

먼저 배에 오른 자들은 배가 뒤집히는 것을 겁내어 뱃전에 매달리는 자들의 손목을 무자비하게 칼로 내려쳤다. 진나라 군의 어느 배에나 잘린 손가락과 손목이 뒹굴었다.

진나라로 장병들과 어렵게 도망쳐 간 순임보가 경공에게 말했다.

“패전의 책임은 군대 총수인 저에게 있습니다. 제발 소신에게 죽임을 명하십시오.”

경공이 그 청을 승낙하려고 하자 상장군 수희가 나서서 반대했다.

“지난날 문공이 성북 싸움에서 초나라 군을 무찔렀을 때 초나라 패장 자옥에게 그 책임을 물어 그를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문공은 두려워하던 적장을 죽여주었다고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지금 초나라 군에 패한데다가 총수마저 죽인다면 오히려 적을 기쁘게 해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순임보는 간신히 죽음을 모면했다.

3년 뒤 초나라 장왕 20년에 장왕은 송나라에 출전해 도읍을 포위했다. 초나라에서 제나라로 보내던 사자를 도중에 송나라가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송나라 도읍을 포위한 지 5개월이 흘렀다.

그러자 성 안에서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군량이 떨어지자 아이들을 서로 바꾸어 잡아먹었고 장작 대신에 사람 시체의 뼈를 땠다.

송나라 장군 화원은 초나라 진영을 찾아가 장군 자반에게 비참한 사실을 낱낱이 호소했다.
그 보고를 들은 장왕은 “과연 군자로다”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당장 포위망을 풀고 돌아갔다.

재위 23년에 장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인 공왕(共王) 심(審)이 왕위에 올랐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