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문인협회 김덕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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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지요?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密多心經)’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지요.

흔히들 부처님이 설하신 팔만대장경을 줄이면 ‘금강경(金剛經)’이고, 이를 더 좁히면 ‘반야심경’이며, 이를 한 글자로 압축하면 빌 공자, 즉 ‘공(空)’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불교를 알려면 최소한도 ‘반야심경’은 알아야 하고, ‘공(空)’의 도리를 확실히 깨치지 못하면 불법(佛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알아보면 어떨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은 ‘색(色)은 곧 공(空)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현상은 인연(因緣)에 따라 끊임없이 생겼다가 소멸하는 것이지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공즉시색(空卽是色)’과 짝을 이루는 구절입니다.

그 ‘색즉시공 공즉시색’ 을 알기 쉽게 설명한 분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때의 문신 이규보(李奎報 : 1168년∼1241년)의 시에서 찾아 볼 수 있지요. 이규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웅시인 ‘동명왕편’을 지었고, 무인정권 시절 당대의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볼 때 이규보가 가히 달관(達觀)의 경지에 이르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승탐월색(山僧貪月色), 산속의 스님이 달빛에 반하여/ 병급일호중(竝汲一壺中), 호리병에 물과 함께 담았지만/ 도사방응각(到寺方應覺), 절에 도착하면 곧 깨닫게 되리/ 병경월적공(甁傾月赤空), 병 기울여도 달이 없다는 것을 -우물 속의 달 (詠井中月)-’

그러니까 우물에 달이 빠져 있는데, 산속에 사는 스님은 그 달을 호리병으로 길러 올립니다. 절에 가져와 물을 쏟아보니 달은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해석하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이 시에는 결코 만만치 않은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철학(哲學)이 들어 있습니다.

즉 시인은 불교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을 이 짧은 시를 통해 명쾌하게 풀이하고 있는 것이지요. 제 1구의 마지막 글자인 ‘색(色)’과 제 4구의 마지막 글자인 ‘공(空)’이 합일을 이루면서, 이 시는 절묘하게 ‘색즉시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물 속에 비친 달빛은 ‘색’인데, 그것을 호리병 속에 담아다 절에 와서 쏟아보니 어느새 그 존재는 달아나고 ‘공’만 남아 있습니다.

즉 형상이란 우물 속의 달빛처럼 달이 지고 나면 곧 사라지므로 공허하기 짝이 없는 일시적인 모습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인생 또한 색입니다. 하지만 그 형상도 죽고 나면 공으로 돌아가 형체가 없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부질없는 인생살이가 이 시 한 편 속에 녹아 있는 것은 아닌가요?

‘색즉시공과 공즉시색’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핵심사상을 표현한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는 자성(自性)이 없는 허상(虛像)의 세계이지요. 그러나 인연으로 인해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이므로 집착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비록 여덟 글자밖에 안 되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불법의 핵심을 놓치게 되어 수행하는데 있어서 많은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지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조사어록(祖師語錄)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달리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서 산과 물이 없어지거나 혹은 산과 물이 서로 뒤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깨달음을 얻어 차별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육신이 몸담고 있는, 차별지(差別地)인 이 세상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세상의 공한 이치만을 깨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공한 세상을 열심히 값지게 사는 방법 또한 깨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색즉시공’은 이 세상이 실체가 없는 허상이므로 중생들이 세상사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공즉시색’은 비록 공한 세상이지만 집착 없이 열심히 세상을 살도록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하지만 역대의 많은 조사들은 ‘색즉시공’을 주로 보여주었을 뿐 ‘공즉시색’까지 잘 보여주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즉 출가하여 산속에서 수행하면서 속세에 대한 집착을 놓는 모습은 보여주었지만 세상 속에서 중생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을 구제(救濟)하는 대승 수행자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치우침은 불교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많은 조사들이 ‘색즉시공’만을 강조한 이유는 중생들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세상의 공함을 강조해 그 집착을 조금이라도 놓게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만일 중생들에게 ‘공즉시색’까지 가르칠 경우 ‘색즉시공’의 가르침은 잊어버리고 ‘공즉시색’만을 마음에 새겨 세상사에 빠져버리는 것을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핵심은 ‘색즉시공’을 근본으로 삼아 ‘공즉시색’하는 것에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이 허상임을 깨치면서 동시에 집착 없이 세상을 위하여 열심히 사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 곧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 바로 대승불교의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색즉시공’ 뿐만 아니라 ‘공즉시색’까지 공부해야 불법을 온전히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는 현실을 외면하면서 도피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종교인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중생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세상을 위하여 열심히 사는 것이 바로 불법의 이치인 것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우물 속의 달’입니다. 세상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위해 열심히 사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연기(緣起)로 이루어진 허상임을 깨닫고 응하여도 주한 바 없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起心)’ 심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험난한 사바세계(裟婆世界)를 극락정토(極樂淨土)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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