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쿠바의 전 국가평의회의장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는 1926년생으로 올해 89세다. 그는 영락없이 병치레를 많이 한 노인처럼 눈은 휑하고 허리는 구부정하다. 인간의 수명이 100세를 넘나드는 장수 시대에 그는 썩 건강한 노인은 아닌 것 같다. 내부적으로는 그가 쿠바 권력의 변함없는 최대주주일 것이라는 추측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공식적으로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그의 후계자는 5살 아래 1931년생 손아래 동생이자 혁명동지인 라울 카스트로(Raul Castro)다. 라울에게 2008년 2월 쿠바 국가평의회의장직을, 2011년 4월엔 마지막 직책이었던 쿠바 공산당 제1서기직까지 내주었다. 라울은 아바나 의과대학생 시절부터 형 피델을 도와 혁명운동에 참여해왔다. 권력의 위계에서도 그는 항상 형의 바로 뒤를 따라붙어 다녔다.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풍조나 종교에 노출되거나 그것들이 침투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한다. 이 둘을 놓고 볼 때는 종교 활동에 더욱 두려움을 느끼고 거부반응을 보인다. 종교에 감응된 ‘인민’은 사회주의 이념 체계에 쉽게 빠져들지 않는다. 따라서 종교는 공산 혁명에 첫 째 가는 반동적 요인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카스트로가 1959년 공산 혁명을 이룩한 후 가톨릭 국가인 쿠바 인민의 종교 자유와 활동을 일체 금지시켰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로마 교황청은 이에 1962년 카스트로를 파문하는 것으로 대항했었다. 그런데 카스트로는 1992년 헌법을 다시 개정해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나섰다.

그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들이 가능할 수 있지만 어떻든 사회주의 국가로서는 모험이며 예외적이고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에 쿠바와 교황청의 얼어붙었던 관계도 해빙이 돼 급기야는 1998년 1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카스트로의 초청에 의해 쿠바를 방문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2013년 3월에는 베네딕토 16세가, 드디어 현지시간으로 2015년 9월 20일에는 소탈하고 겸허한 인품으로 인기를 모으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바나를 방문했다. 그는 그곳에서 현재의 실권자인 라울 카스트로는 물론이거니와 피델 카스트로와도 그의 집에서 비공식적으로 만났다. 더욱 뜨거운 세계적 관심사가 된 것은 라울보다는 오히려 피델과의 비공식적인 만남이었다.

외신들이 전하기로는 교황과 피델 카스트로의 만남은 ‘매우 친근하고 우애 깊었다’고 했다. 30~40분에 걸친 전체 만남의 피상적인 분위기는 그리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대조적이며 예사롭지 않았다. 눈이 휑한 피델은 결코 죽음이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노쇠(老衰)’가 가속화되는 노인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그는 더 이상 혁명전사의 표시로 늘 푸른 군복과 군모를 쓰던 기력이 왕성하던 현직 때의 그 팔팔했던 피델 카스트로가 아니었다. 이제는 파랑 빨강 흰색의 헐거운 아디다스 운동복을 넥타이 없는 셔츠에 아무렇게나 받쳐 입어 일부러 은퇴자임을 표시하려는 것 같은 병색이 짙은 노인일 뿐이었다. 보통 사람의 눈에도 그런 그는 애처롭기 짝이 없어 보였다. 기네스북에 오른 49년 최장수 집권 기록자이며 초강대국 미국에 결연히 맞서 목숨과 체제를 부지하면서 체 게바라(Che Guevara)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의 반미(反美) 및 사회주의 혁명의 아버지 또는 원조(元祖)라며 사자후를 토하던 그였기에 더더욱 애처로워 보이는 것을 피할 수 없는지 모른다.

한편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1936년생으로 올해 78세인 건강미 넘치는 영혼의 지도자 교황의 눈빛과 표정에는 카스트로에 대한 연민(憐憫)으로 가득했다. 교황의 눈빛과 표정을 그렇게 읽어내는 것이 옳다면 교황을 바라보는 카스트로의 눈빛과 표정은 ‘자비’를 갈구한 것이 된다. 사람은 늙으면 거의 예외 없이 누구나 죽음에 대해 심각한 사유(思惟)를 하게 된다. 아무리 골수 유물론자요 공산주의 이념가이며 혁명가라 해도 카스트로의 형편에 이르면 그 같은 사상과 신념 체계만을 꼭 믿고 붙들고 있으면서 죽음을 맞기는 뭔가 준비가 부족하며 불안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신격화나 개인숭배에 맛들인 독재자라 해도 다를 것이 없을 성 싶다. 그렇지만 카스트로는 자신을 신격화나 개인숭배의 대상이 되도록 허용하지도 않았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 같은 인간적인 초심을 유지한 인물이라면 쿠바에 종교의 자유가 다시 허용된 것은 그가 늙어 죽음에 관한 사유를 심각하게 하게 된 것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가설을 성립하게 한다. 물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체제의 불안을 키우는 것이었다면 그가 허용하고 싶어도 권력 핵심들의 완강한 반대로 그렇게 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쿠바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사회주의 국가의 금기를 예외적으로 깨게 된 것은 그 나라 국민들 사이에 심어지고 쫙 퍼진 종교의 뿌리가 도저히 ‘이념’으로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넓어서였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종교의 활동을 억누르는 것이 사회주의 체제의 안정으로 가는 길이기보다는 억누름으로써 도리어 불안을 키운다는 타산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현 집권자 라울 카스트로는 교황을 맞아 미국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해준 교황의 역할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쿠바는 미국의 경제봉쇄와 숱한 체제 전복 및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암살 기도, 무력 침공 등에 시달려온 왔던 것이 사실이다. 미국은 말하자면 피델에게 그의 머리 위에서 머리카락 하나에 간신히 매달려 겁에 질리게 하는 ‘다모클레스의 칼(the sword of Damocles)’과 같은 ‘위험한’ 존재였다.

쿠바는 빈국이며 아주 조그만 나라다. 이런 나라를 이끌면서 피델 카스트로가 지금까지 어떻게 그 같은 미국의 압력을 견디어냈는지 그것은 어쩌면 능력보다는 행운이며 기적이었다. 대미(對美) 화해는 쿠바에 새로운 환경을 제공했다. 그것이 세계 최하 수준인 ‘인민’의 삶과 행복을 한껏 끌어올려 놓을 수 있을지 어떨지는 지금부터의 관심사다. 쿠바는 부패척결과 교육, 건강, 의료와 스포츠 등 일부 부문에서는 높은 효율을 보이는 나라로 유명하다. 그것들을 제외하고는 쿠바 혁명은 요란한 빈 수레처럼 쿠바를 이끌어왔다. 역사의 심판은 가혹하다. 죽음과 가까워지기는 해도 결코 평범한 인물은 뛰어넘은 피델 카스트로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보다도 바로 그 가혹한 역사의 심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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