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시사칼럼니스트

 

필자가 원구단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고종황제와 관련된 책을 읽고 경술국치 100년을 기억하면서 대한제국의 상징인 원구단을 재조명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먼저 이러한 원구단은 어떠한 곳이었는지부터 생각해 보겠다.

원구단은 지금으로부터 113년 전인 1897년 10월 12일 고종황제가 하늘에 제(祭)를 올리고 황제로 즉위하여 대한제국을 반포한 곳이니, 한마디로 대한제국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신성한 영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구단이 경술국치 2년 전인 1908년 칙령 50호에 의해서 황실소유에서 국유화로 바뀌면서 그 비극의 전조가 나타나더니 급기야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하여 완전히 국권을 잃게 된 그 이듬해인 1911년 2월 20일 원구단의 모든 부지와 건물이 조선총독부 철도국으로 이관되면서 사실상 원구단의 수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1913년 비록 국권은 잃었지만, 대한제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원구단에 마수의 손길을 대기 시작하니, 구체적으로 원구단을 철거하고 바로 그 자리에 호텔을 짓게 되는데, 겉으로는 철도를 신설하면서 거기에 따른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숙소가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대한제국의 심장부인 원구단을 파괴함으로써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백성들의 대한제국에 대한 향수를 근본적으로 제거하려는 음모가 있었다고 본다.

본래 원구단은 1897년 10월에 조성된 것을 시작으로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서 비로소 1903년에 완성된 면모를 갖추게 되는데, 철거될 당시 원구단을 비롯하여 정문, 향대청, 어제실, 황궁우, 동서무, 전사청, 석고각, 광선문 등의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본 건물인 원구단은 완전히 철거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으며, 그 이외의 부속건물도 철거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아픔이 있었다.

이렇게 일제에 의하여 철거된 원구단 터에 일제는 그 이듬해인 1914년 9월에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조선호텔)을 준공하며, 해방 후까지 계속 존재하다가 비로소 1967년 그 호텔을 완전히 철거하고 새로운 호텔을 신축하게 되니 바로 이것이 오늘날의 조선호텔이다.

생각하여 보면 1913년에 원구단이 철거되었으니, 올해가 철거된 지 정확히 97년이 되었는데, 이제 어느 덧 원구단이 철거된 지 거의 100년의 역사가 흘렀다.

필자가 원구단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관심이 갔던 부분이 그 건물의 행방에 대한 것이었는데, 특히 석고각과 광선문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석고각은 석고단 영역에 있었던 건물인데, 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이 되는 1902년에 고종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석고를 안치한 전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석고각이 본격적으로 수난을 받게 되는 계기가 1923년 조선총독부 도서관이 석고단 영역에 세워지면서부터였다.

이러한 총독부 도서관이 세워진 이후 1927년에 먼저 석고각의 정문으로 이용되던 광선문이 남산에 위치한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의 정문으로 옮겨지더니 그로부터 8년 뒤인 1935년 석고각마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의 종루로 이용되는 신세로 전락이 된다.

생각해 보라!
고종황제의 권위와 연관이 있었던 석고각이 이등박문을 추모하는 사찰의 종루로 사용되는 전각으로 전락되었으니, 원구단 수난의 한 단면을 보는 거 같아서 착잡한 심정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박문사의 종루로 사용되던 석고각에 중대한 고비가 있었으니, 그것은 해방이후인 1945년 11월 23일 박문사에 화재가 일어난 것이다.

사실 필자는 해방 때까지 존재하였던 석고각이 이러한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바로 며칠 전에 석고각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발견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1958년 11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박문사터에 현장답사를 하는 사진이었으며, 거기에 놀랍게도 이대통령 뒤에 석고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 석고각이 적어도 1958년까지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여실히 입증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석고각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석고각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이 있었던 이유가 물론 고종황제의 권위와 관련이 있었다는 부분도 있지만, 비단 그 뿐만이 아니라 석고각을 처음 볼 때부터 느꼈지만, 그 규모의 웅장함에 매료되었다는 점이다.

석고각을 대하는 순간, 마치 그 웅장하고 장엄하였던 원구단의 축소판을 대하는 느낌이어서 문화재적인 차원에서도 석고각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석고각이 화재로 소실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존재하였다는 사실에 매우 감격스러웠으며, 한편으로는 이러한 석고각이 오늘날에는 왜 없는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드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서 설사 그 흔적은 끝내 찾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어떻게 해서 없어지게 되었는지 그 과정만큼은 반드시 밝히고 싶은 것이며, 일단 1958년까지는 존재하였다는 것이 확인된 만큼 이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1959년 1월부터 시작된 영빈관 공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과연 이 때 어떤 상황이 발생한 것인지 매우 궁금하다.

석고각의 위용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은 안 되지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당시 영빈관 관련 문서부터 하나씩 단계적으로 조사할 생각이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격언이 있듯이 이렇게 석고각의 흔적을 찾겠다는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으니, 반드시 그 단서가 발견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석고각에 대한 본격적인 자료추적을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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