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때다. 손안에서 혹은 안방에서 아니 그 어디서든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바로바로 접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지구촌(地久村)’이라는 말이 등장했던가. ‘세계(世界)’라는 단어보다 훨씬 친근감 있는 표현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 것이다.

‘촌(村)’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며 서로 공유하며 살아가는 최소의 공동체 단위를 뜻한다. 그렇다면 지구촌이란 말은 세계가 하나의 가족이며 이웃이란 의미가 된다. 하지만 지구촌이란 말이 등장할 때만 해도 세계는 지구촌이라 할 정도로 서로 이웃하지 못한 채, 서로 먼 나라일 뿐이었다. 다만 세계는 언젠가 하나의 가족과 이웃처럼 모든 것을 공유하며 함께할 때가 곧 도래할 것을 암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는 한없이 발달된 문명의 이기(利己)로 말미암아 실제 지구촌이 돼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즉, 세계는 지금 이웃이 돼 모든 것을 함께 보고 들으며, 또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그야말로 이웃이 돼 있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안타까운 것은 표면적으로는 지구촌이 돼 있으나, 이면적으로는 서로 반목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미완성의 지구촌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기득권과 구습과 종교와 문화의 차이라는 늪에서 벗어나지 못해 지구촌이란 말을 무색케 하는 안타까운 현상들이 자고나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조금만 돌아보면 이를 해결하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방법도 없지 않다는 점을 공유했으면 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구동존이(求同存異)’다. 즉,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같은 점은 추구한다’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를 맞이한 것이다. 이 구동존이는 1955년 4월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에 참석한 29개국 대표들이 좀처럼 이견(異見)을 좁히지 못하고 있을 때, 중국 대표로 참석한 총리 저우언라이(주은래)가 “같은 것은 함께 추구하고 다른 것은 남겨두자”고 제의함에 따라 논의는 다시 급진전해 급기야 ‘반둥 10원칙’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 후 중국이 미국을 비롯해 체제와 의식과 가치관과 문화가 다른 서방 국가와의 관계개선을 추진할 때 자주 사용되던 외교전술이다.

현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구동존이가 주목 받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오랜 세월 굳어진 생각과 의식과 가치관과 관습과 문화의 차이를 어찌 쉽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다름을 앞세우지 말고, 같은 점부터 찾아보고 공유해 보자는 것이다. 이 시대에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적절한 표현이자 방법이 아닌가 싶다. 형식적 지구촌이 아니라 실질적 지구촌 나아가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인류가 추구하는 공동의 가치를 향해 함께 노력하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할 때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조금씩 그 간격을 좁혀가야 한다. 특히 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東北亞), 즉 한·중·일은 다가오는 새 시대를 이끌어갈 세계의 중심국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또 반드시 그리돼야 하는 공동의 운명을 지닌 공동체 국가들이다. 그러함에도 지금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반목하고 대립하는 가깝고도 먼 나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그 유사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긴 모습에서부터 문자나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른 점보다 유사한 점이 훨씬 많으며, 또 밀접한 관계성까지 가지고 있다. 지난 3일 중국의 전승 70주년 기념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이 주변국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참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양국 정상회담을 통해 수동적이고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 자세로 한·중·일 삼국의 정상회담 필요성과 개최의지를 나타낸 것 또한 높이 살 만하다.

일찍이 안중근 의사가 주창한 동양평화론의 의미와 가치를 오늘날 한·중·일 삼국의 지식인들이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구동존이라는 말처럼 삼국은 동양의 평화를 위해 기득권과 욕심을 버리고 공동의 목표 즉, 지구촌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부합된 ‘지구촌 건설’을 위해 일차적으로 동양의 평화를 이뤄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동북아라는 공동의 문화권 안에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같은 것은 추구하고 다른 것까지라도 서서히 이김으로 회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공동의 운명체이기 때문이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弘益)의 사명을 가진 대한민국의 절대적 숙명(宿命)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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