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보다 앞섰다는 주장이 제기된 증도가자 금속활자본. 8000년을 이어가는 한지의 내구성을 잘 보여 주는 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우리나라는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훈민정음 등을 포함한 총 11건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보유한 수로는 세계에서 5위, 아시아에서는 1위이며, 중국과 일본을 제치고 가장 많은 세계기록문화유산을 보유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많은 기록유산을 보유한 데는 기록을 할 수 있는 종이 즉, 한지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한지의 내구성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 그래서 ‘천 년의 유산 한지’라 불릴 만한 것 아닐까.
이번 창간 6주년 문화 기획면을 통해 ‘수천 년을 이어온 한국의 기록문화’에 대해 짚어본다.

세계 5위·아시아 1위 기록문화유산 보유국
기록, 후대에 남기기 위해 사실을 적은 글
한지 내구성, 일본 화지의 4배인 ‘8000년’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기록(記錄)’의 가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다. 당대에 남긴 기록을 통해 후대에 역사가 되고, 교훈이 되며 또한 당대의 기록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성 등을 갖추고 익히는 교육의 모태가 되기 때문이다.

기록은 사전적 의미로 ‘주로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은 글’이다. 후일에 남길 목적이라고 하지만, 이미 당대에도 기록물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기록은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고대 근동에서는 최소한 B.C. 25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에 의해서 기록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처음에는 지금과 같은 표음문자가 아니라 상형문자였으며, 소리를 상징화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림이나 뜻을 상징하는 문자가 사용됐다. 이어 소리글자 또는 소리를 지시하는 신호형 부호가 생겨났고, 문자는 그 후에 나오게 됐다고 알려진 것이 일반적이다.

알파벳 형태로 된 기록은 애굽(이집트) 사람들이 처음 사용했다. 히브리인들이 사용한 철자는 베니게(페니키아)인들의 것이었다. 후에 등장한 헬라어는 베니게어와 아람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대한 내용은 기원전부터 기록된 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성경에 본바 고대에는 진흙, 나무, 금속판, 돌, 서판 등에 기록(신27:2~3, 수8:32, 눅1:63)했으며, 후대에는 가죽 종이(딤후 4:13) 등에 기록했다.

▲ 한지의 우수성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사진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록을 후대에 어떻게 남겼느냐이다. 후대에까지 기록을 잘 보존해 남기기 위해선 기록하는 방법도 매우 중요하다. 금속활자를 주조해 인쇄하는 방법도 있지만, 기록에선 종이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전통 한지 “100번의 손길 거쳐야 완성”

인류 사회에 있어서 문화의 발달은 종이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한지는 예부터 ‘문방사우’에 포함될 만큼 우리 민족과 가장 가깝게 지내왔다. 한지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4세기경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제지술도 함께 전해 내려온 것으로 전해진다.

한지는 닥나무의 ‘닥’을 주원료로 해 ‘닥종이’로도 불린다. 닥나무(Broussonetia Kazinoki S.)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낙엽성 관목으로, 자연에서 자라면 3~6m 정도까지 성장하고, 한지 원료로 매년 베어내면 2m 정도로 자란다.

닥나무는 우리나라 전국에 분포하며, 양지에서 잘 자라 따듯하고 비가 많은 지방일수록 성장이 좋다. 지역적인 품종 변화가 심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참닥’은 섬유가 잘 풀리고 섬유 간에 엉킴으로 생기는 조롱이 적어 균일하다. 또한 양지의 원료인 목재펄프에 비해 섬유가 길며, 강인하고 보존성이 좋은 특징이 있다.

‘닥풀(황촉규)’은 닥나무로 한지를 만들 때 사용하는 분산제다. 주로 황촉규 뿌리의 점액질을 사용한다. 닥섬유를 물에 풀 때 닥풀을 넣어 젓는데, 닥풀은 닥섬유가 응어리지지 않게 해 종이의 질을 고르게 하고, 접착이 잘 이뤄질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한지는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고, 색깔이나 크기, 쓰임새, 생산지 등에 따라 다르게 불리기도 했다. 그 종류는 대략 200여종에 이른다.

귀리짚을 원료로 한 ‘고정지’, 마의 대를 잘게 부수어 섞어 만든 ‘마골지’, 짚을 잘게 부수어 섞어 만든 ‘마분지’, 분을 먹인 흰색의 ‘분백지’, 뽕나무 껍질을 섞어 만든 ‘상지’, 솔잎을 잘게 부수어 만든 ‘송엽지’, 닥나무에 소나무 속 껍질을 섞어 만든 ‘송피지’, 버드나무를 잘게 부수어 섞어 만든 ‘유목지’, 버드나무 잎을 섞어 만든 ‘유엽지’, 털과 같이 가는 해초를 섞어 만든 ‘태장지’, 물이끼를 섞어 만든 ‘태지’, 황마를 섞어 만든 ‘황마지’, 다른 원료와 목화를 섞어 만든 ‘백면지’ 등 원료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우리나라는 나름대로 창조적인 기술개량을 통해 종이 생산에 힘썼으며, 그 결과 신라시대에는 희고 곱게 다듬은 종이가 중국에 수출됐다. 고려시대에 들어 수공업의 전문화와 인쇄술, 제지술이 발달하면서 더욱 질 좋은 종이를 수출하게 됐다.

더욱 다양하게 발전된 종이는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의 기록을 위한 용도뿐만 아니라 공예 기법으로도 창조, 발전시켜 다양한 용도의 생활용품과 장식 예술품으로도 활용됐다.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며 세계 속에 한지의 우수성을 펼치고 있다.

◆요한 23세 교황 지구본, 한지로 복원

▲ 요한 23세 교황 지구본 (사진출처: 뉴시스)
이르면 내년 4월, 한지로 복원된 성 요한 23세 교황의 애장품 지구본을 만날 수 있다.

지난 4월 외교부는 이탈리아 베르가모의 성 요한 23세 교황 박물관에 소장된 교황(1881~1963년)의 애장품인 ‘요한 23세 교황 지구본’을 한지를 활용해 복원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동안 유럽 문화재 복원에 주로 일본의 화지(和紙)가 사용됐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전통 한지를 사용해 복원한다는 발표는 획기적이었다.

복원은 세계적인 문화재 복원 전문가인 넬라 포치가 맡았다. 당시 외교부는 “넬라 포치가 테스트한 결과 한지의 내구성이 8000년에 달할 만큼 견고해 현재 이탈리아 시장에서 취급하는 일본 화지를 능가하는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고 전했다. 일본 화지의 내구성은 1750년 정도로, 한지가 무려 4배나 높다.

지구본은 둘레만 4m가 넘는 대형이다. 특히 이 지구본에는 분단 이전 한반도의 모습이 담겨 있고, 당시 세계 가톨릭 교구 분포도가 상세히 표시돼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됐다.

생전에 접견실에 둘 만큼 지구본을 아꼈던 성 요한 23세는 접견실에서 손님을 맞을 때마다 지구본 앞에 서서 “어디에서 오셨느냐?”고 물은 후 지구본으로 내빈의 국가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100번의 손길을 거쳐 만든 정성과 과학적인 기술로 오래 두어도 기록이 잘 보존될 수밖에 없는 한지. 우수한 내구성으로 세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한지.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

◆용어설명
황촉규: 무궁화과에 속한 일년생 초본으로, 뿌리에서 얻은 점질물은 한지 및 박엽지의 제지에 널리 사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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